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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Oct 25. 2021

가을 자리

가을이 쓸쓸하지 않다.


숱한 삶의 풍파에 무뎌졌을 법도 한데, 아직도 계절에 따라 마음이 흔들린다. 가을이 풍기는 차분함과 쓸쓸함에 유예됐던 상념들이 고개를 든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거나 맑은 하늘에 고요히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 가을이 너무도 처연해 가슴이 아려온다. 조용해서, 고요해서 내면의 소리는 더 크게, 분명하게 들려온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자리는 여전히 욱신거리며 아프다. 나의 근원적 슬픔이 시작된 자리, 어쩌면 이승에선 영원히 아물 수 없는 상처인지 모른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에겐 정말 각별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는데 우리와 함께 살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란 나에게 어머니는 아버지 역할까지 최선을 다 해 주셨다. 그래서 풍족하진 않아도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다.  


자라는 동안 아버지의 빈자리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뭔지 모를 그리움과 갈망의 욕구가 마음 한 편 깊은 우물처럼 자리하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언젠가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그때 어머니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어머니의 상처를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다시는 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어머니는 당시 공무원이었는데, 나는 어머니에 대해 보이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달필이어서 친구들에게 자랑했던 기억, 지적이고 단아한 모습, 날씬한 몸매에 무슨 옷이든 잘 어울려 주위에서 멋쟁이란 소릴 들었던 기억, 그런 것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살다 보면 일상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무엇으로 인해 깨지는 경험을 한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가 싶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그때 알게 됐다.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아버지가 너무 밉고 원망스러워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놓고 말았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나무랐다.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냐고 하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비록 가장이나 남편으로서 역할은 못했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만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종종 나를 찾아오셨다. 학교나 집 앞으로, 그리고 보고 싶었다는 듯 나를 안고 뺨을 비볐다. 그럼 나는 매몰차게 얼굴을 돌려버리곤 했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매번 나에게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였지만 항상 거부한 것은 나였다.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어머니와 나를 무책임하게 팽개쳤다는 원망과 분노가 가슴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진짜 가장이 되신 어머니는 작은 어깨에 가족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홀로 세상과 맞서야 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여자가 사업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음을 감안할 때 어머니의 사업수완은 그런대로 괜찮았던 것 같다. 꽤 잘 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사업이란 것이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경기에 영향을 받던 품목이었기에 사업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그동안 자신의 몸도 돌볼 겨를 없이 치열하게 살았던 어머니의 심신은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다시 기력을 회복하려 무던히 노력하셨다. 엄격하고 완고하셨던 어머니는 나에게 더할 수 없이 다정다감하셨다. 늘 일에 바빠 자상하게 나를 챙겨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감정 표현도 매우 솔직해져 정말 친구처럼 허물이 없었다. 어머니는 무엇을 예감했던 것일까?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돌아가시기 전, 나는 성장하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소중함, 같은 여자로서 어머니에 대한 이해, 아픔을 느꼈다. 어머니를 향한 애정도 더 깊어졌다. 하지만 대가는 참혹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는 비정함, 처음으로 운명의 견고한 벽 앞에 절망했다.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심신이 약한 상태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은 나를 걱정한 친척들의 조치였다. 그때 나와는 전혀 무관하게 여겼던, 관념적으로나  존재했던 죽음을 지척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마음의 결핍은 심신의 공황을 가져오기 충분했다. 만약 그 당시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의 운명은 비극적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 사람은 지금의 남편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살아갈 힘을 주고 희망을 부여하는 가장 고귀한 축복이다.


그 후 결혼생활에서 권태를 느끼거나 다투고 화가 날 때면 항상 그때를 떠올린다. 그러면 다툼의 문제가 정말 하잘 것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고 그 사람이 얼마나 나에게 소중한 사람인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지금, 가을 자리에 앉아  부모님을 기리는 영화 한 편을 본다. 오래된 필름 속 부모님을 다시 만나니. 가슴이 먹먹하다. 부모님은 자애로운 모습으로  자책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신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는데도, 아버지 생전 다정하게  대하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잎들이 수북이 쌓여 가을 자리를 덮는 것처럼, 흐르는 시간에 옛 기억들도 서서히 희미해 겠지.  애써 기억하지 않겠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고 살면 곁에 없어도 늘 함께 한다는 걸 믿기에 올 가을은 정녕 쓸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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