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산을 오른다. 겨울 동안 산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이 몹시 생경하다. 산은 늘 내 곁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안다. 산은 찾지 않으면 그 누구 곁에도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산을 찾는 이유는 많지만 힘듦을 자처하기 위해서이다. 몸을 단련시키는 일이 삶의 의지를 북돋워준다는 사실을 진작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면 나뭇가지가 오래된 뼈처럼 달각달각 소리를 낸다.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거나 바리케이드를 친 것처럼 걸음을 방해한다.
잠시 돌아서 갈지, 다리를 크게 벌려 넘어갈지 아니면 뾰족하게 보이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살짝 밟고 갈지 망설인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난 작은 길로, 작은 몸을 구부리고 빠져나간다. 작은 몸이 자꾸 작아지는 기분이다.
요즘 그렇다. 몸도 마음도 작아지는 느낌이다. 키가 줄어든 건 나이 탓이라 할 수 있지만 마음이 작아진다는 것은 위축과 자신감의 결여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삶을 정리하고 평온해야 할 시기에 붙잡고 싶은 혹은 떨쳐버리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이중적 모순에 사로잡히곤 한다.
얼마 전까지 하던 일도 그만두고 진짜 백수가 됐다. 아이들 독서와 글쓰기뿐 아니라, 학교 시험, 수행평가 등 학습에 필요한 대비를 해줄 때는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꼈다. 의무와 책임이란 무거움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삶의 규칙과 힘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는지, 그 무게를 덜고 나니, 새삼 느낀다.
앙상한 가지들이 앞 다투어 싹을 틔우고 있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나무는 아직 헐벗었지만 금방이라도 여린 새순들이 병아리처럼 입을 벌리고 조잘댈 것만 같다.
얼마쯤 올라가니 커다란 까마귀 떼들이 하릴없이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우람한 몸짓으로 커다랗게 서로를 부르는 울음소리, 어떤 절실함이, 동시에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했다.
그림자를 찾았다. 수풀사이를 헤매는 그림자, 무엇을 찾는지 궁금했다. 늘 붙어 다녔지만 그것이 진짜 나인지 의심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와 똑같이 행동하는 존재가 그냥 허상에 불과한 것인지, 산을 오르는 내내 엉뚱하다 할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보통 나는 꿈을 잘 안 꾼다. 꾸더라도 내용이 뒤죽박죽이라 잘 기억하지 못했다. 꿈은 아무 의미 없는, 숙면을 방해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꿈은 달랐다. 너무 생생했고 놀라웠고 무서웠다.
그림자 같은 시커먼 존재가 따라다니며 내 속을 파고들려 했고 나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떼어내려 했다. 그 장면이 여러 번 되풀이 됐는데 간신히 떼어내면 또 달라붙었다. 그래서 그것을 물에 빠뜨리기도 하고 목을 졸라 질식시키려고도 했지만 다시 살아났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두려움과 절망에 몸부림치며 눈을 떴다. 베개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여명 위로 실재인지 허상인지 모를 너무도 선명한 꿈의 잔재가 허우적거리며 떠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얼마 전에 읽은 하루키의 책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상징과 은유로 점철된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벽, 그림자와 같은 소재로 치환시켜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는 환상적 리얼리즘 기법의 소설이었다.
책을 읽으며 그림자에 대한 의미를 생각했다. 그림자를 떼어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림자가 분열된 자신의 모습이라면, 그림자는 바깥에서, 그림자를 떼어낸 존재는 벽 안에서 분리돼 살아간다. 신체와 영혼이 분리된 비현실적 가상의 세계가 추구하는 바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절대 자유와 순수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실의 삶에서 그림자를 떼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양심과 선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자신의 부정적이고 거짓된 모습을 떼어버리고 싶어 한다. 삶을 성찰하면 할수록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탐욕과 위선의 옷이 불편하다.
평일이라 산이 조용하다. 산을 오를 때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다. 하산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제법 시간이 흘러 그림자가 저만치 자리를 잡았다. 산등성이에 앉아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본다. 한 때는 탄탄했을 돌들도 부서진 채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산 아래 펼쳐진 아파트와 집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듬은 채 말이 없다. 모든 그림자도 각자의 사연을 품은 채 고요하다. 둘의 공통점은 아마도 관용이 아닐까 싶다. 치열한 열정이 뱉어낸 삶의 흔적들을 말없이 포용하며 진정시키는 단순함.
산에서 바라보는 만물은 그냥 하나의 생명인 듯했다.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고뇌에 찬 생각과 감정들이 흩어져 사라지길 바라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