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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22. 2018

허무와 슬픔의 변주, 아라이의 (색에 물들다)

강렬한 표지 색깔과 약간은 자극적인 제목이 무척 인상적인, 두 권으로 이뤄진 장편소설이다. 아직은 생소한 티베트의 작가 아라이의 작품을 접하게 된 계기는 독서모임의 토론도서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아라이는 1959년 중국 쓰촨 서북부에 위치한 아페 티베트족 자치구에서 출생했다. 이곳은 지금도 티베트인들에게 ‘쓰투’라 불리는데, 이 명칭은 네 명의 투스가 관할했던 지역임을 뜻한다. 아라이는 티베트는 물론 중국에서도 주목받는 작가로 이 작품으로 중국 ‘마오둔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로 시작하는 1인칭 시점 소설의 첫 장면은 매우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다. 눈이 내린 새벽 '나'는 침대에 누워 야생 화미새들이 서로를 불러대는 소리를 듣는다. 그의 어머니는 질 좋은 구리 대야에 따뜻한 우유를 넣어 손을 가꾸고, 하녀는 시중을 든다.

설산 아래 풍경은 빛을 받아 더욱 하얗고 눈이 부시다. 흰색을 유난히 좋아하는 티베트 민족은  백의민족인 우리와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흰색은 너무 투명하고 순수해  다른 색으로 물들기 싑다는 생각도 동시에 듵었다.


‘나’는 권력의 핵심 마이치 투스(부족장)의 둘째아들인데, 모두 '나'를 바보라 한다. '나'가 바보가 된 것은 투스가 술에 취해 '나'의 어머니와 같이 잤기 때문이다. 한족인 '나'의 어머니도 자신이 투스의 둘째 부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투스가 술에 취한 상태였기 때문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행운이 됐다고 믿는다.


‘나’의 형은 영리하고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다. 투스는 장자세습을 원칙으로 해서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형은 장래의 투스가 된다. 투스의 권력은 절대적이다. 각 지역을 다스리는 투스들은 서로 경쟁한다. 투스 밑에는 소족장이 있어 백성을 관할하고, 그 아래 커빠 (파발꾼), 가장 아래 계급은 노예이다.


투스의 지위는 뼈로 상징되며 어떤 법의 논리가 아닌 원초적 질서의 법칙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그것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숙명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여자는 투스가 원하면 자신을 바치고, 권력이나 힘을 가진 남자의 여자가 되기를 원한다. 여자노예의 경우 투스는 물론 그의 자식들에게 몸을 바치는 것도, 버림을 받는 것도 당연시된다.


부족사회의 특성이 그러하듯 티베트도 고유의 정서와 풍속, 자연과 전설,신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문화적 개성을 지녔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전통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불교와 원시신앙은 새롭게 유입된 서양의 종교와 대립하고 때론 수용하면서 거센 역사의 조류에 휩쓸려 간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밑바닥 삶을 영위하는 하층민들은 이승의 삶보다 저승의 삶에 희망을 갖는 법이다 그렇지 읺으면 현실의 차별과 억압, 핍박의 고통을 어떻게  인내하고 살겠는가.


중국과 인도의 중간에 위치한 티베트는 두 거대 국가에게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두 나라의 경계에서 완충역할을 하는 티베트는 크기는 한반도의 여섯 배나 되지만 인구는 삼 백  만 정도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두 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소수민족 티베트였기에 작가는 그들의 모호하고 불완전한 정체성의 문제를 책 속 바보 주인공을 통해 끊임없이 묻고 제기한다.


테베트인들은 중국을 검은 색으로 비유하며, 자신들을 평하길 죄악에 대해 시비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중국인 같고, 생활에 괴로움이 있어도 그것을 즐기는 것은 하얀 색의 인도를 닮았다고 했다.


티베트의 정체성 문제는 주인공이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뜨며 스스로 묻는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누구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작가는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으로서의 티벳이 중국의 굴레에서 겪는 여러 문제를 소설을 통해 형상화한다.


마이치투스는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신식무기를 들여와 경쟁관계에 있던 왕뻐투스를 제압하게 된다. 그 후 황 특파원의 권유로 넓은 땅에 양귀비를 심고, 재배하여 엄청난 부를 쌓게 된다.


넓은 들판을 붉게 물들인 양귀비의 향기에 취한 마이치 투스는 제어할 수 없는 욕정에 빠져 소족장의 아내를 탐하고 소족장을 죽인다. 그리고 그의 심복도 죽이며 살생은 이어진다.


도덕적 타락을 불러오는 쾌락의 혼돈에서 대지는 마침내 폭발한다. 지진이 발생하고 이를 재앙의 징조로 여긴 라마와 활불은 티베트의 전설과 신화를 근거로 종교적 예언을 하고, 이에 따른 의식을 거행한다.


소설에는 티베트는 물론 당시 중국의 암울하고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이 내재돼 있다. 티베트 투스는 중국의 실세 권력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우된다. 당시 중국은 청 왕조가 무너지고 공산당과 국민당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잠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몰아내기 위해 국공합작이 이뤄지지만 다시 두 세력은 대립되어 싸운다. 티베트 지도자들은 어느 편에 서야할지 고민하지만 결국 국민당을 지지하게 되는데, 이는 작가의 정치적 성향이 표출된 것이라 짐작된다.


소설 속 주인공의 작은 아버지는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작은 아버지는 인도와 중국, 영국을 드나들며 매우 자유분방하고 근대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영국에 있는 주인공 누나의 보호자 역할을 하며, 재산 관리를 해 주는 그는 매우 지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다. 주인공은 유독 작은 아버지를 좋아하며, 그를 믿고 의지한다. 그가 중국에서 정치자금을 요구했을 때 주인공은 많은 양의 은을 보내준다. 이처럼 작가가 추구하는 정치적 성향이 인물을 통해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양귀비를 아편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의 기술자가 티베트에 오고, 만들어진 아편은 다시 중국으로 가져간다. 아편이 청나라를 무너뜨린 것처럼 양귀비 씨앗 때문에 티베트의 부족들도 파멸한다. 온 천지에 그것을 심어 식량부족으로 사람들이 굶어죽고,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 부족끼리 싸우고 죽이며 티베트는 아수라장이 된다.


이때 마이치 투스는 바보 아들의 말을 듣고 농사를 농사를 짓는다. 그리고 수확한 곡식을 다른 투스들에게 팔거나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그 뒤 주인공은 변방에 가서 장사를 하고 시장을 확장해 그곳을 번창하게 만든다. 반면 형은 영토 전쟁을 일으켜 번번이 패하는 바람에 주변의 신뢰를 잃는다.


주인공은 바보라지만 사실은 매우 뛰어난 인물이다. 겉만 보는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 하지만 사관처럼 사물을 꿰뚫어 보는 이는 그의 실체를 안다. 평소 엉뚱한 말과 행동으로 바보 취급을 받지만 위기 해결 능력은 매우 뛰어났으며,가끔은 매우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으로 아버지와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한다.


바보 투스는 어눌한 듯 순수하며 정과 의리가 있어 아랫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여자들도 그의 따뜻함과 깊은 마음에 감동하여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그는 투스의 계승을 두고 벌어지는 암투와 시기, 모함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바보를 택했는지 모른다. 또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견뎌냈을 것이다. 그의 예지력과 통찰력은 권력이란 오직 하나여서 혈육이라 할지라도 나눌 수 없는 비정한 것임을 간파했을 것이다.


주인공은 말이 아닌 실천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고, 권력을 탐하지 않았기에 경계대상에서 배제돼 안전할 수 있었다.


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주인공은 아버지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투스의 자격을 인정받고,형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권력은 이 책의 원제목인 ‘진애낙정’처럼 허무하게 무너진다. 마이치 투스 가문은 결국 원한을 품은 자객에게 모두 살해당하며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작가는 마이치투스의 바보 아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투스라는 독특한 권력제도는 티베트의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지배와 피지배의 보편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관계의 모순을 소설의 바보 인물을 통해 전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티베트의 강력한 통치자지만 역설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투스들의 고독한 행보는 권력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티베트인이 유난히 흰색을 좋아하는 것은 순수함과 깨끗함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티베트는 중국이 전해 준 신식무기와 양귀비, 매독에 의해 핏빛으로 물들며 몰락한다.


순수하고 소박했던 티베트 고유의 전통과 문명이 강대국의 영향으로 변질되고 파괴돼 가는 모습을 처연히 그려내고 있는 소설은 지배자의 횡포와 종말을 통해 권력의 무상함을 전하고, 소수민족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통찰하여 인간 평등과 존엄성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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