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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25. 2018

채만식의 <탁류>

 

탁류》는 채만식(1902~1950)의 장편소설이다. 처음 시선을 끄는 것은 제목의 상징성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혼탁함 속에 놓인 민중의 고달픈 삶과 시대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봉건체제가 해체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민족은 뿌리가 뽑힌 채 ‘역사의 탁류’ 속에 휩쓸려 가고 있었다. 작가는 탁한 시대의 흐름을 금강의 물줄기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금강...부여를 한 바퀴 돌려다가는 급히 남으로 꺾여 단숨에 논산, 강경까지 들이 닫는다. 여기까지가 백마강,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않은 처녓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진다.'  그리고 군산 항구에 다다르면 물은 탁해지고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역사의 탁류, 삶의 탁류와 맞닥뜨리게 된다.


작가는 여주인공 초봉의 삶을 점점 탁해지는 금강의 흐름과 대비시키며 앞으로 전개될 비극적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다. 과거의 고요했던 꿈은 깨지고 맑았던 물이 탁해지는 곳이 바로 서민들의 미래와 희망을 앗아간 식민지 하의 군산이다.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터전인 군산은 식민시대 일제의 착취와 수탈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비극적 공간이다. 


「탁류」는 주인공 초봉의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비극적 삶을 형상화함으로써 30년대 우리 민족이 처한 부정적인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당시 비정상적인 세태의 구조적 모순과 병폐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형 할인과 미두에 대한 광기 어린 투기로 몰락해가는 소시민의 삶을 문제 삼고 있다.


당시 서민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과거보다 더 궁핍한 삶을 살아야 하는 모순된 현실에서 정신마저 황폐화되고 분열돼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과정이 정주사의 모습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정주 사는  여주인공 정초봉의 아버지이다. 그의 성격과 특징을 잘 함축하고 있는 것이 소제목  ‘인간 기념물’이다. ‘입만 가졌지 손발이 없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가난한 사람이다. 그는 먹여 살려야 할 식구는 많지만 일이 없는 무능한 인물로 희화화되고 있다.


정주 사는 선비 집안 출신으로 신학문을 하고 과거 군서기를 지내기도 했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된다. 그리고 군산으로 온 이후 뚜렷한 직업도 없이 전전하다 미두꾼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는 무능력한 가장으로 책임감도 저버리고 미두 투기에만 몰두한다.


정 주사는 당대 사회의 이중적인 모습, 신구 문명이 공존하는 시대의 성격을 반영하는 인물이다. 지식인이면서 봉건적 사고에 얽매여 노동도 체통 때문에 할 수 없고, 여기저기도 속하지 못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소외 양상을 보여준다. 이런 모순되고 부정적인 세태에 물든 그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앞뒤를 살피지 않고 딸 초봉과 고태수의 혼사를 성립시키면서 딸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사실 정 주사는 무능하고 뻔뻔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만 불행한 시대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식민시대의 현실로부터 소외당한 도시 빈민층의 대다수 서민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탁류」의 주인공 초봉은 외모는 예쁘고 청초하며 매력적이지만 성격적으로는 백치에 가까운 인물이다. 집안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이며, 나약하고 이기적인 정 주사와 물질적 타산에 빠른 유 씨의 계산에 희생당하는 가냘프고 순종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겪는 불행과 비극은  부모의  이기주의와 욕정에 찬 남성들의 횡포로 인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그녀 자신의 책임도 있다. 그녀는 물질적 가치에 빠져 진정한 사랑인 남승재를 외면하고 속물적 인간 고태수를 선택했다. 그녀의 단순하고 수동적인 사고와 주체성 없는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라 생각된다.


그녀는 험난하고 모순된 시대를 극복하기엔 너무 유약하고 의존적인 성격적 결함이 있다. 또한  여학교까지 나왔음에도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짓지 못하는 의지박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첫사랑 승재를 잊지 못하면서도 부친과 집안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감상에 빠져 고태수와 결혼한다. 그녀의 무력한 수동성은 합리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희생과 순진함, 선량함과 같은 미덕으로 미화돼 나타난다.


초봉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 결여는 식민지하에 그녀가 받은 근대적 교육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녀의  운명론적 세계관은  부모세대의 잔재인 봉건 의식의 소산이다. 이처럼 모순된 가치의 충돌은 현실인식 결여와 정체성 부재의 요인이 됐을 것이다.


초봉은 주인공으로서 탁류의 시대를 살아가기에 너무 미약하고 수동적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그녀는 마치 다른 인물이 된 것 같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타락과 자포자기는 너무 작위적이며, 행동의 타당성이 결여된 느낌이 든다.


그녀는 남편 고태수가 죽고, 꼽추 장형보에게 겁탈을 당하자 죽으려고 한다. 하지만 체념하고 서울로 올라와 백제호와 동거를 한다. 이처럼 그녀는 독립적 자아를 포기하고  운명에 자신을 맡기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러다 마지막에 장형보를 죽이는  것으로 전혀 다른 성격의 변화를 겪는다.

 

초봉이 최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행위가 살인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표출되는데,이런 점 때문에 통속 소설로 치부되기도 한다. 관점에 따라  이 작품을 세태, 통속, 리얼리즘 소설로 보기도 하지만, 그렇게 분류해서 작품을 단편적으로 볼 수는 없다. 환경과  인간이 뒤엉켜 형성된 삶이라는 총체적 시간 속에 시대적 리얼리티가  내재돼 있고, 그것이 역사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품을 바라보면 긍정과  전망,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탁류」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은 남승재와 정계봉이다. 작가가 추구하는 세계와 미래에 대한 전망이 두 인물의 삶을 통해 형상화된다.  승재와 계봉은 초봉과 달리 현실 체험과 내면적 성찰을 통해 현실을 직시한다.


남승재는 고아라는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독학하여 자신의 힘으로 의사가 된다. 또 그는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불우한 처지의 환자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주고 야학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휴머니즘을 실천한다. 계봉 또한 가부장적인 부모 밑에서 많은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빈민층의 생활 경험을 통해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의식을 지니게 된다. 그들은 빈곤과 부패의 문제, 육법전서론, 독초론 등  현실의 문제를 진지한 대화를 통해 논의하고 해결할 방법을 모색한다.


이처럼 작가는 긍정적인 두 인물을 통해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한 세태를 비판하고, 그들이 부당한 세상을 개혁할 주역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통해 시대의 탁류에 휩쓸려가는 조국과 민족의 운명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미래의 빛인 승재와 계봉이 절망에 빠진 초봉에게 희망을 준 것처럼 당시 위기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전하며, 불행한 시대의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나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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