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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Apr 06. 2018

헨드릭 하멜의 <하멜표류기>

 

{하멜일지}에는 ‘스페르베르 호 생존 승무원과 선원들이 조선이 지배했던 켈파르트 섬에서 1653년 8월 16일 조난당해서부터, 1666년 9월 14일 그 중 8명의 선원이 나가사키로 탈출할 때까지 조선에서 일어났던 일을 쓴 기록’ 이라고 적혀있다.


하멜일지는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서 13년 간 억류생활을 하면서 기록해 두었던 것들을 고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 정리하여 보고서 형식으로  만든 책이다. 보고서를 만든 목적은 조선에 억류됐던 기간 동안 받지 못 한 임금을 동인도 회사에 청구하기  위해서였다.


「하멜표류기」는 그동안 몇 종의 번역본이 나왔는데 13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탈출한 하멜 등 선원들의 기록을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둔갑시켜 흥미본위로 쓴 것들이었다. 그 후 다행히도  1920년 네덜란드 학자 후틴크가 하멜의 정본을 발간하면서 조선을 제대로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하멜표류기'는 최초로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을 담은 책으  「하멜일지」와 「조선국에 관한 기술」로 구성돼 있으며, 17세기 조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하멜은 네덜란드 호르쿰에서 태어났으며, 20세에 네덜란드를 떠나 동인도 회사에 입사한다. 그는 23살 되던 1653년, 무역선 스페르베르 호에 승선하여 바타비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타이완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게 된다.

항해 중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게 되고, 64명의 선원 중 그를 비롯하여 36명만이 살아남아 켈파르트(제주도)에 표착한다.  하멜일행은 처음에 이곳이 무인도인줄 알았다. 그러나 중국식 복장에 말총으로 만든 모자를 쓴 사람들이 나타나자  해적이나 추방된 중국인이 사는 곳이라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하멜 일행은 곧이어 나타난 관군들에게 체포되어 제주 목사의 관저로 끌려가는데, 당시 목사였던 이원진은 낯선 외국인들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해 주는 등 관대하게 대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표류 동기를 알아보기 위해 네덜란드 사람으로 조선에 귀화한 벨테브레(박연)를 파견한다. 그 역시 네덜란드인으로 예전에 제주도에 표류하였지만, 현재는 귀화하여 훈련도감의 화포제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멜일행은 박연을 통해 ‘외국인은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실망한다. 

하멜일행은 제주도에 10개월 간 감금돼 있다가 다음 해 5월에 서울로 호송돼 왕(효종)앞에 끌려간다.


왕은 그들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를 묻는다. 그리고 자신이 부양할 테니  이 나라에서 죽을 때까지 살라며 그들을 훈련도감의 호위병으로 임명한다. 그 뒤 그들은 사람들의 흥밋거리가 되어서 자주 고관 집에 불려갔으며, 동네 구경꾼들 때문에 편히 쉬는 날이 없었다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였다.


하멜일행은 이교도의 나라에서 고통스럽게 살 수 없다며 탈출을 결심한다. 그들 중 몇 몇은 청나라 칙사가 왔을 때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며 구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뇌물을 받은 칙사로 인해 발각되고 탈출은 실패한다. 그 뒤 항해사와 포수는 서울로 압송돼 옥에 갇혔다가 얼마 후 죽는다.


 일이 있은 후 그들에 대한 감시는 더욱 심해진다. 조정은 논의 끝에 그들을 전라도 강진 군영으로  유배보낸다. 그들은 그곳에서 잡역과 노역을 하며 곤궁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들은 유배간 곳의 절도사에 따라  생활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자신들에게 자비심과 관용을 베푼 절도사는 임기가 만료되어 더 높은 지위로 영전됐으며, 자신들에게 가혹했던 절도사는 좌천되거나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했다.


대기근으로 일반 백성들도 굶어죽는 일이 많아지면서 하멜일행도 극심한 가난으로 구걸까지 하게 된다. 얼마 후 그들은 남원,순천, 여수 등으로 분산 배치되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예송논쟁 등 당파 싸움은 극에 달해 조정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해진다. 이 틈을 타서 그들은 여수에서 탈출한다. 일행 중 하멜을 포함해서 7명은 작은 배를 타고 고생 끝에 드디어 나가사키 인근 섬인 고토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일 년 간 더 머무른 후 마침내 고향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조선국에 관한 기술」에서는 조선의 지리, 정치. 행정, 군사, 어업과 농업, 교육 , 종교 등 조선의 전반적인 정보를 기술하고 있다.


「하멜표류기」는 서양인의 시선으로 조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데, 특히 당시 조선의 총체적인 풍경을 조감할 수 있도록 해 준다.

하멜일행이 조선에 억류됐던 효종 때는 두 차례의 전쟁을 겪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고 효종은 북벌정책으로 실추된 왕실과 조선의 권위를 회복하려 했다.

국력이 약해지고, 청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많은 조공을 바쳐야했고, 야만족이라 무시한 청과 일본에 자존심을 짓밟혔기 때문에 조정은 극도로 예민해져 외국인에 대한 의심과 반감이 컸을 것이라 추측된다.  따라서 하멜일행을 과도하게 감시하고 나라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하멜일행과 일본 나가사키 총독과의 인터뷰에서 조선에 대한 정보를 집요하게 물어보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국제정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총독은 조선의 무기와 군사장비, 요새의 위치와 식량 실태, 정치적 상황, 조선인들의 종교와 사람들의 생활모습 등 중요한 정보에서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까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들은 이미 조선을 침략의 대상으로 여기고 미리 정보를 수집하는 치밀함을 보인 듯하다.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조 정부는 당파 싸움에 빠져  '우물 안 개구리' 처럼 안일에 젖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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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일지'에 적힌  조선에 대한 언급 중 ‘국민성’에 대한 부분이 매우 놀랍다. 그들은 우리 조상의 인격에 대해 “조선인은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며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라고 여긴다.” 또 “조선인은 성품이 착하고 매우 곧이 잘 듣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나 믿게 할 수 있었다.” 이런 일관성 없는 평가가 어떻게 나왔는지 의문이다. 두 차례의 전쟁으로 땅이 황폐해지고 가뭄이 심각해 백성들의 삶이 무척 궁핍하고 어려웠던 점을 감안할 때 도둑이 많았을 거라 생각된다. 그런  모습을 보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조선인들의 행실을 문제 삼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외국인인 그들을 대하는 조선인의  태도에 따라 단순하게 그들을 평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한 나라의 전통과 문화, 관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멜일행이 조선에서 13년을 살면서 조선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는지 하멜일지에 나온 것만으론 판단할 수 없다. 그들에겐 이교도의 땅에서 고난과 불행을 겪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국적을 초월해서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서로 통하는 보편적인 정서가 있다. 그래서 하멜일지에 고생 중에도 조선인들의 친절과 정에 위로 받았 던 느낌을 서술해 놓기도 했다. 이처럼  관심과 애정을 갖고 조금 더 여유롭게 조선을 바라보았다 면 하멜일지의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생사가 달린 문제이고 탈출이 절실했기에 자신들이 겪고, 보고 느낀 부분만 기록하기에도 벅찼을 것이다. 또한 기록문 자체가 순수한 기행문과 달리 임금청구를 위한 것이고, 그것도  돌아가서 쓴 것이기 때문에 사실이 왜곡된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한 나라의 역사가 수많은 사실과 왜곡과 은폐로 뒤엉킨 총체라 볼 때 중요한 것은 기록의 진위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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