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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14. 2018

자유롭게 살고 싶어!

 

나는 넓고 투명한 유리창 옆 카펫에 발라당 누워 따스한 햇살이 배를 애무하도록 다리를 쫙 폈다. 비록 유리창 밖이지만 누워서 보는 세상은 무척 평화롭다. 새파란 하늘 도화지에 구름 그림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펼쳐져 . 고양이 그림을 찾아본. 저 광활한 하늘에 닿을 수 있다면 그림이 돼도 좋을 것 같았다.

자유란 저 하늘만큼 고귀하고 무한한 것이겠지?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 삶 속에서 어떻게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상상하는 자유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어디에도 구속됨 없이 바람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이루기  힘든 일 것이다.


바깥세상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현실의 삶이 얼마나 각박하고 위험한지 귀동냥으로  짐작할 뿐이다. 가끔 뉴스를 통해 가출하거나  버려진 동물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또  영역 다툼이나  짝짓기 할 때 서로 피터지게 싸워 몸이 성한 데가 없는 길고양이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만약 자유를 찾아 밖으로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곤 했다.

 


자유를 향한 갈망은 모든 생명의 본질일지 모른다. 페르시아 고양이는 사육되고 있는 삶이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자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양이가 주체성 없이 단지 호기심이나 구속이 싫어 집을 나가 멋대로 산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닌 방종일 것이다. 페르시안 고양이가 밖에 사는 길고양이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의 질서에  따라야 한다. 혼자 살지 않는 한 자유엔 또 다른 속박이 따른다. 


자유의 의미는 너무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며 범위가 넓어 뭐라 정의하기 힘들다. 물리적인 자유도 있고 정신적인 자유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건 내가 현실에서 자유를 제대로 누리려면 상대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 자유가 중요한 만큼 다른 고양이의 자유도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질서와 규칙이 생기고, 법과 규율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도들이 역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작용하기도 한다.

갑자기 부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봉지가 상념에 빠져 있던 나의 눈을 빠르게 스쳐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발톱을 세워 봉지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찢어진 봉지에서 흙이 쏟아졌다.

'' 앗!  깜짝이야.''

''  와~냥이 민첩한데요?  아빠가 냥이 위로 봉지를 휘두르니깐 그렇지요.''


남자는 헤링본 무늬의 얄팍한 카펫을 반으로 접어 한 쪽으로  치우고, 작은 원탁 테이블을 당겨 그 위에 쟁반을 두고 검은 봉지를 놓았다. 반쯤 찢어진 비닐 봉지에서 흙이 묻은 가늘고 길쭉한 식물이 나왔다. 남자는 실처럼 가는 뿌리에 엉겨 붙은 훍을 탁탁 털더니 그것을 정성껏 과도로 다듬었다. 혼자 제사 준비를 하는 남잘 보니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퇴직을 한 후 집안 살림을 거의  남자가 맡아서 하고 있다. 나는 남자가 안쓰러워  그르릉대며  부드러운 털로 남자의 다리를 비볐다.


어젯밤 늦게 돌아온 여자는  눈 뜨자마자 바쁜 일이 있다며 아침까지의 흔 고스란히 남긴 나가 버렸다. 제사준비는 어떻게 할 거냐는 남자의 말에 그런 일로 자신을 구속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쌩 하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한 건 여자가 가사 일에 소홀할수록 자유는 커녕 현실의 속박에 얽매였다.

너저분하게 쌓인 빨래며, 개수대를 가득 메운 그릇들, 흐트러진 이불 위로 훨훨 날리는 나의 털들이 여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여자의 생각을 아는지 궁금할 것이다. 여자가 밤늦게 돌아와 나를 안고 주절주절 하소연을 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자유를 갈망하지만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해 오히려 가족의 원망과 잔소리에 구속당하고 하는 일마다 간섭을 받았다. 가정이란 공동체에서 가족 구성원에게 책임을 다 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만을 추구한다면 그도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어려울 것이다.


언젠가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다고 했다. 그는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많은 경험을 하고,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는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통찰했다고 들었다. 물리적 자유가 어떤 제약이나 한계에 부딪혀 좌절되기 십상이라면 정신적 자유는 생각에 따라 무한히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원효대사라는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거라면 자유로운 삶 또한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그래서 나도 가출한 페르시아 고양이를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처럼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생각하고 상상하는 자유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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