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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30. 2018

삶은 선택의 연속

  

''백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뭐가?”

“인생 말이야, 그럼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그래도 마찬가지야, 지나고 나면 또 그런 생각할 걸?”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하네.”

“내가 어른스러운 게 아니고, 오빠가 유치한 거야.”

남매가 대화할 때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들 곁에 앉는다. 처음엔 잘 나가다 끝은 항상 다툼으로 끝나는 그들의 언쟁은 tv 정치 설전만큼이나 흥미롭다.

“유치하다니, 뭐가 어때서?”

“생각해 봐, 만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 삶에 만족할 거 같아?”

“바보야, 그걸 뭐 심각하게 생각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깐 그냥 푸념하는 거지.”

“바보?  누가 ?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허비하는 오빠가 어리석지.”

‘올 것이 왔구나. 어째  오늘은  빨리 왔네.’ 나는 기지개를 쭉 펴고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려 했다.

“고양아! 너 이리 와 봐.”

여자애는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안으려고 했다.

“양아~”

남자도 나의 다리를 잡았다.

“내가 먼저 불렀잖아.”

“네가 강제로 잡으니깐 양이가 싫어하잖아!”

“내가 보기엔 오빠가 다릴 잡으니 싫어하는 거 같은데?”

“그럼 얘가 선택하게 놔 둬.”

갑자기 남매가 나를 두고 싸우게 되니, 순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게 아닌데, 이러다 나만 귀찮게 되겠어. 빨리 피해야지.’ 나는 꼬리로 바닥을 탁탁 몇 번 치며 싫은 표현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찰나 그들이 부스럭대며 무언가를 꺼냈다.

“양이야~ 너 좋아하는 닭고기 간식 줄게.”

남자가 말하자 동시에 여자애도 소리쳤다.

“여기 연어 통조림이야.”

남매는 서로 자신들에게 오라며 평소 내가 좋아하는 간식으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가지 않았다. 조금 후 내 밥그릇에 그것들이 놓여 있을 걸 알기 때문이다.


사실 살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베란다 옆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어디에 앉을 까 갈등할 때라든지 (의자엔 푹신한 방석이 있고, 테이블은 높아 해가 더 많이 든다.) 지금처럼 내가 좋아하는 간식을 다 놓치고 싶지 않을 때이다. 문득 언젠가 여자애가 들려준 이솝우화 「욕심 많은 개」가 생각났다. 욕심 많은 개가 뼈다귀를 물고 다리를 건너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컹’ 짖다 물고 있던 뼈다귀마저 놓쳤다지?


솔직히 사람들이 ‘우화’라 부르는 이야기, 동물들을 탐욕스럽고 어리석게 만들어 사람들을 풍자하고 교훈을 준다는데, 동물 입장에선 기분 나쁘다. 잘 알다시피 동물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 사냥하고, 또 필요 없는 살생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에 순응하며, 본능대로 살아갈 뿐이다. 동물 세계에선 인간 세계처럼 끝없는 욕심으로 다른 생명과 재산을 무자비하게 해치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을 빗대어 자신들의 잘못을 풍자하는 것은 당당하지 못하다. 인간들은 무엇이든 직접 드러내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슨 비유며, 상징이 그다지 많은지, 그런 것 때문에 오히려 오해와 갈등이 생기는 거 아닌가?


말싸움, 내가 보기에는 그게 그것 같은데, 사람들은 유식하게 보이는 걸 좋아해서인지 논쟁이라고 부른다. 무슨 주제를 가지고 서로 생각의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우리 동물들은 따지고 경쟁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도 짝짓기 할 때만은 양보하지 않는다. 상대를 차지하지 못하면 종족보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일의 발단은 이 집 아들이 자신의 직업선택을 후회하면서 시작되었다. 대학 전공과 다른 일을 하자니 적성에 맞지 않고,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자니 만족한 일자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 생활을 해야 하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싫은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라고 툭하면 불만을 터뜨린다. 그렇다고 인생마저 잘 못 됐다는 식의 생각은 위험천만이다.


내가 보기엔 백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천성이라는 고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단지 바탕 그림 위에 각각의 색깔로 인생이라는 그림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물론 환경과 부모의 영향에 따라 색깔은 다양하게 나타나겠지만 말이다.


나는 남매의 짧은 대화를 듣고, 인간들이 만든 우화를 역으로 동물을 위한 우화로 만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그런데 인간을 빗대어 동물의 삶을 풍자하고 비판하자면 동물들이 그만큼 나쁜 짓을 많이 해야 하는데, 동물들의 삶은 단순하고 본능적이니 교훈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아무튼 남매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짧은 우화를 만든다면 이런 교훈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백지의 삶을 원하는 동물이 있다면, 어리석은 동물이다. 고양이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은 태어나면서부터 종족이라는 굴레를 지고 나온다. 이미 뱃속에서 동물 종류에 따라 성격도 모습도 개성도 정해진다. 생의 백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백색이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편견이다. 아무리 색깔이 더덕더덕 칠해져도 다시 지우고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채색의 깊이에 따라 지우는 정도는 다르지만 말이다.


얼마 전 방송에서 본 바에 의하면 버려진 고양이도 좋은 주인을 만나면 인생을 얼마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고양이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음에도 버려졌지만 끝까지 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희망이 생긴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교훈은 ‘선택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라’이다. 선택을 후회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는 일은 자신을 패배자로 만들 뿐이다. 애완 페르시아 고양이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충만했음에도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해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험난한 집 밖 세상으로 나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고양이는 탐험심이 강한 고양이로 안주하는 삶보다 개척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설사 그 고양이가 잘 못 된 선택을 했다 해도 그에 따른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선택이 잘 못 됐다고 생각하면 주저 없이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아무리 수동적인 삶을 사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선택은 항상 우리 앞에 놓여 있고, 따지고 보면 선택의 기회도 무수히 많다. 그래서 나는 ‘한 번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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