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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Apr 08. 2018

사랑의 말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다시 거실로 이어지는 여닫이 중문이 있다. 그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역 ㄷ자 구조로 이뤄진 작은 공간이 있다. 막힌 쪽에 옷 방이 있고 문설주와 연결된 벽면과  화장실이 마주보고 있다. 화장실 바로 맞은편 벽면에 내 화장실이 붙어있다. 화장실은 내가 아기 때부터 쓰던 것으로 분홍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높이 50센티, 길이는 약 45센티 정도 되는데 바닥엔 모래가 깔려 있다. 한 때 미끈하고 희었을 뚜껑은 손때가 묻어 노랗게 변했다. 위로 젖히는 뚜껑에는 작은 문이 달랑 매달려있어 내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힌다


화장실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그곳이 나에게 무척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생리적 욕구뿐만 아니라  정신적 욕구를 해소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카타르시스와 비슷한 것인데 나의 경우 배설을 하면서 불쾌하고 우울했던 감정까지 배변과 함께 배출하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사람도 마찬가질 것이다. 화장실에서 편안하게 여유를 즐기는 것을 보았다. 주인 남자는  신문을 보고,  여자는 책을 보고 딸은 핸드폰을 보느라 한 참을 그곳에 머무른다. 고양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보다야 짧지만 어쨌든  일을 보고 배설물을 모래로 덮고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그처럼 중요한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일을 본다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수치심인지 가족들은 모를 것이다. 가족은 내가 노망을 했다거나 실수를 했다거나 아님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수선을 떤다. 그러나 나는 멀쩡하다. 그들의 말을 못하는 대신 행동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무척 깔끔하다. 더러운 것을 싫어해서 틈만 나면 세수하고 몸을 닦고 털을 고른다. 내 혀는 수세미처럼 까끌까끌해서 웬만한 것은 깨끗하게 닦여진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고양이의 습성 정도는 알고 있으련만 가족 바쁘다는 핑계로 화장 치워주는 것을 서로 미뤘다. 내가 화장실 앞 거실 마루에 배변을 본 것은 더러운 화장실을 이용하기 싫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들의 무관심에  더 화가 났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화장실 앞에 또 똥을 싸놨네. 어휴 냄새 지독해. 화장실이 있는데 왜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다 싸놓는 거지? 무슨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야.”

“화장실은 깨끗한데? 무슨 불만이 있나 봐.”

“바쁜데 고양이까지 말썽이네.”

막 외출을 하려던 여자가 내 반항의 결과물을 보고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다. 듣고 있던 딸이 맞받아치며 나를 옹호해준다.

“엄마, 고양이 야단치지 마요!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고양이가 무슨 불만이 있음 그런대.”

“불만은 무슨, 제 때 먹을 것 주겠다, 가끔 간식도 주고, 화장실이야 바쁘면 자주 못 치워줄 수도 있지. 그렇게 고양이가 걱정되면 네가 신경 써서 바로 치워주면 될 거 아니니? 예뻐만 하고 뒤처리는 다 엄마가 하라는 건 잘못된 거지.”


나 때문에 가족이 다툴 때는 나란 존재가 무가치하게 느껴진다.  언제부턴가 나는 각이라는 것을 기 시작했다. 전에는 눈과 코와 같은 본능적 감각으로 사물을 느끼고 행동했지만 요즘 어떤 생각에 몰하면 행동보다 생각이 앞선다.  고양이가 생각한다는 건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이야기 속처럼 가능한 일이다.

몇 달 전부터 내가 사는 집에 아이들이 많이 오기 시작했다. 주인 여자가 하는 일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주인 여자는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상상이라는 것을 하게 됐다. 이야기를 들으면 자꾸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말이라는 도구는 참 이상했다. 직접 보고 듣고  몸으로 체험한 것들이 말로 전해지고 또 글로 옮겨지면서 다른 내용으로 바뀌거나 또 덧붙여져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된다.


나 때문에 식구들이 옥신각신 할 때 ‘옥상의 민들레’라는 짧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삼형제 중 막둥이로 태어난 남자 아이는 우연히 엄마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내용을 듣게 된다. 늦둥이로 태어난 자신을 삶의 군더더기라 하며, 무슨 일을 하던 걸림돌이 된다는 식의 말을 듣고 자신이 가족에게 불필요한 존재라 여겨졌고, 그래서 죽으려고 옥상에 올라갔다. 하지만 척박한 콘크리트바닥을 뚫고 핀 민들레를 보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내려왔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아이가 어려서 엄마가 대화하는 상투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했지만 엄마도 생각 없이 함부로 말을 해 아이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여자가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책의 주제는 각박한 시대에 가족의 사랑과 같이 소중한 가치를 지키며 살자. 뭐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엔 말을 함부로 하지말자가 더 맞는 것 같았다.


이야기 속 교훈을 통해 사람들은 무엇이 잘 못 됐는지 배우고 반성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한다. 그래서 경계의 말들은 계속 재생산된다.


동식물은 사람이 사용하는 말은 못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다. 말 자체보다 말에서 풍기는 감정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다. 하고자 하는 말에 따라 표정, 행동, 심리 상태 등 비언어적 표현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좋은 말을 하면서 화나는 표정과 행동은 하지 않는다.

예전에 주인 집 딸이 어렸을 때 학교 과제로 식물을 기르고 관찰을 했는데, 아이가 어디서 들었는지 식물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잔잔한 음악을 들려주면 예쁘고 건강하게 자란다고 하면서 ‘식물아, 사랑해!’했다. 그 뒤 관심을 주어서인지  식물은 잘 자랐다. 생명은 모두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심이 담긴 말은 말 못하는 생명도 알아듣지만 겉만 반지르르한 말은 아무런 공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화장실이 아닌 마루에다 실례를 한 것은 이야기 속 아이와 같은 심정에서였다. 내가 가족이 왔을 때 반가워서 그르릉 하며 몸을 부비는 데도 그들은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 밥그릇엔 언제 줬는지 모를 사료가 딱딱하게 굳어있고 물은 바닥나 있었다. 이야기 속 아이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존재라 느껴 살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나 또한 식구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며 이상행동을 통해 그들의 관심을 받고 싶었고 가족이 나를 사랑하는지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동화는 해피엔드로 끝났지만 나의 현실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렇다고 나의 행동이  「머빈의 달콤 쌉쌀한 복수」에 나오는 머빈과 같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머빈은 가족이 자신을 여행에 데려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복수를 했는데 그 행동은 귀엽고 유치하고 철없는 짓이다. 가족은 머빈을 데려가고 싶었지만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못 데려갔다. 머빈은 자신을 향한 가족의 사랑을 알고 있다. 복수는 그저 얄미운 객기일 뿐이다. 그러나 나의  행동은 이유가 있기에 타당하다. 만약 식구들이 진짜 나를 귀찮은 동물쯤으로 안다면 진짜 복수를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바빠서 표현을 못 했을 뿐이라고 믿고싶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것처럼 가족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나의 마음은 얼음 녹듯 술술 풀릴 것임을 알고 있다. 아니 예전처럼 나를  꼬옥 안아주는 따뜻한 품이면 족하다. 그러면 나도 배변 때문에 가족을 괴롭히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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