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작부터 묵직하고 심오한 삶의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특히 이 영화는 격렬한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가는 인물들의 삶을 다루는 만큼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감상해야 할 것 같았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유대인 박해와 당시 유럽의 상황,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던 20세기 초가 배경이 되고, 아모스의 가족이 머무르던 예루살렘이 공간적 배경이 된다. 화면을 압도하는 암울한 분위기와 조용하고 애잔히 흐르는 배경음악, 여주인공의 지적이면서 우울한 이미지, 엄마와 아이의 이야기 놀이 속 새떼가 하늘을 덮는 어둡고 황량한 세계 등은 당시 어두운 현실의 메타포임을 알 수 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는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의 사전 정보를 통해 여주인공(파니아)이 레옹에서 어린 소녀로 나왔던 나탈리 포트만이며, 그녀가 각본, 감독까지 맡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영화에서 본 모습이지만 깜찍하고 예뻤던 소녀가 단아하고 우수에 찬 모습의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한 것이 인상 깊었다.
처음 영화를 대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원작 소설을 떠올렸다. 방대한 역사적 리얼리티와 함께 작가의 체험적 삶이 고도의 문학 장치로 형상화된 원작을 어떻게 영화로 압축해 보여줄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역시 원작과는 다른 영화만의 특성을 살린 영상미와 인물의 내면 연기, 배경 음악 등 시청각적 효과를 통해 전쟁과 폭력의 심각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원작의 스케일과 깊이를 담아낼 수 없는 제한성으로 인해 영화는 아모스의 어머니 파니아의 내면 심리와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 어머니는 원작에서도 작가가 가장 많이 언급한 인물인 만큼 작가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상처받은 고국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루살렘,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한 가족을 노인이 된 아모스의 눈이 뒤따르며 비통한 목소리로 말한다. ‘예루살렘은 교미가 끝나기도 전에 연인을 잡아먹는 독거미 같다.’ 의미심장한 말 속에 예루살렘의 고통 받고 일그러진 모습이 그려졌다. 기독교인이나 유대인 무슬림이 그토록 신성시하던 땅 예루살렘은 전쟁과 폭력, 죽음으로 뒤덮인 참담하고 황폐한 땅이 되었다. 축복의 땅이 저주의 땅이 돼버린 역설적 현실 앞에 고뇌에 찬 눈빛이 친지와 전화 통화를 위해 발길을 재촉하는 기억 속 가족의 모습을 애처로이 쫓는다.
영화는 매우 서정적이며 음울하다. 잔잔하면서 처연한 음악을 배경으로 노인이 된 아모스가 어머니를 그리며 회상하는 장면이 가슴 뭉클하다.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감수성 풍부한 문학소녀로 지적이며 높은 이상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우아하고 고상한 풍모와 순수한 영혼을 지녔다. 소녀시절 지상 낙원 이스라엘을 꿈꾸었으나, 자신의 집에 머무르던 장교가 자살하는 것을 목격하고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험한다. 그 후 남편 아리에를 만나 열렬히 사랑하고, 아모스를 낳고 살지만, 늘 마음 한 편에 자리한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그녀를 괴롭힌다.
오랜 세월 얽히고설킨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유럽 국가들의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된 역사의 현장에서 어린 아모스가 바라보는 부모님은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할 줄 아는 지식인이었으며, 유럽을 증오하면서도 동경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었다. 지식에 대한 욕구가 강했기 때문에 당시 선진국은 문화적으로 앞선 나라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민감한 문제를 다룰 땐 아모스가 듣지 못 하도록 다른 나라 말로 대화했다. 하지만 정작 아모스에게는 안전을 위해서인지 히브리어만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감정을 표현하는데 무척 서툴렀는데 그것은 수천년 간 억압 받고 살아온 민족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소설가이자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투쟁하는 시온주의 혁명가이기도 하다.
1948년 마침내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였지만 중동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엔 전쟁과 테러, 폭력이 끊이지 않았으며 예루살렘은 치명적 독을 품은 독거미처럼 위험한 도시가 되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파니아는 친지와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전쟁은 가슴 깊이 도사리고 있던 예전 죽음의 공포를 다시 불러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은 누구보다 더 상처받기 쉬운 법이다. 파니아는 현재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면과 환각의 어둠 속에 갇혀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허무와 절망의 나락으로 빠진다. 그리고 심신이 점점 피폐해지면서 결국 젊은 나이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다.
불행한 역사의 희생자가 돼 처참하게 무너져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어린 아모스와 남편 아리에의 엇갈린 시선이 기억에 남는다. 남편의 무심한 눈길과 달리 어린 아모스는 어머니가 자학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본다. 생기를 잃은 창백한 어머니의 고통을 어린 아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린 아모스는 애어른이 돼 버린 것 같았다. 끝까지 사랑하는 어머니 곁에서 힘이 돼 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이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내 소중한 작은 늑대, 무엇보다 너의 순수함을 사랑해.’
영화를 비롯해 모든 예술은 감상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평가와 의미, 느낌도 제각각 다를 것이다. 내가 이번 영화를 감상하며 느꼈던 것은 중요한 뭔가가 빠진 듯한, 마치 완성된 퍼즐 속에서 한 부분만 떼어 슬쩍 본 것 같은 결핍의 감정이었다. 그건 원작의 감동을 영화가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대단한 모험일 수 있다. 물론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느낌으로 봐야겠지만, 원작을 읽은 경우 무의식적으로 작품과 비교돼 새로운 느낌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배경지식을 책에서 충분히 얻고 영화를 보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다. 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지만, 이번 영화 감상은 원작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동기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