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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y 24. 2018

정지용의 (향수)

넓은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올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꿈엔들 잊힐리야

                                           —〈향수〉전문-

 

 모처럼 정지용의 시를 다시 음미해 본다. 사무치도록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이 생생히 느껴진다.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듀엣으로 불러 더 유명해진 시다. 토속적이고 친근한 내용에 아름다운 멜로디가 잘 어우러져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실개천이 흐르고,  황금빛 들판에서 황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평범하고 소박한 시골 풍경은 마치 정지된 그림처럼 누구나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을 고향의 모습다. 


곡식을 수확한 뒤  맞는 조금은 여유로운 겨울 밤, 밖은 바람 소리 요란한데 질화로가 있는 방 안은 따스하고  안락하다. 밤이 깊어가고 아버지와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 새 질화로의 불이 식었다.  짚베개를 베고  드신 아버지의 깊게 주름진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고향은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이다. 유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그곳은 언제나 돌아가고픈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고향을 향한 귀소본능은 생명을 지닌 피조물의 숙명적 노스탤지어이다. 어른이 된 후 거칠고 비정한 세계를 경험하고 현실에 대한 고통이 심할수록 순수하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더욱 강해지고, 향수병은 더욱 깊어진.


이상과 꿈이 가득했던 곳이지만 부당한 힘에 의해 빼앗기고 훼손된 그곳을 차마 잊지 못해 절규하는 후렴구가 상실의 아픔과 비애를 더욱 극대화한다. 사랑하는 것을 보지도 품지도 못하고 그리워만 햐는 것은 정말 비극이다. 정지용의 <향수>가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역사적 성찰을 바탕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애절하게 담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가끔 각박하고 메마른 도시를 벗어나 고향처럼 푸근하고 편안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내 고향은 도시기 때문에  향수를 불러 일으킬 만한 곳은 도시 변두리 정도이다. 그나마  고향조차  많이 변해버린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노스탤지어는  아마도 꿈 속에나 존재할 것 같다.  그 꿈이 바로 시로 발현된다. 고향이나 그 무엇이 그리울 때 향수를 나직이 불러본다. 그러면 심연에 케케묵은 온갖 감정의 찌꺼기가 액체가 돼 뜨겁게 솟아오른다. 그런 카타르시스를 통해 마음에 위안과 용기를 얻고 삶을 재충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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