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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Mar 31. 2022

이유식

이유식을 시작한 지 반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나에겐 어려운 이유식. 돌이 지났으니 어른들이 먹는 음식에서 소금간만 조금 덜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이유식 관련 책들을 보면 주눅이 든다. 정성스레 우려낸 맛국물에 다양한 재료를 넣고 알맞게 익혀 차려낸 이유식 사진들을 보면 반감마저 드는 것이다. 이유식을 파는 곳도 다양하니 사 먹여 볼까도 생각했지만 한 끼 한 끼 너무나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온 플라스틱 포장에 영 마음이 무겁다.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아이를 핑계로 이렇게 마구 더럽혀도 괜찮은 건지 마음이 쓰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매일 비슷한 볶음밥과 반찬으로 연명하듯 이유식을 먹이고 있다. 그래도 참 다행한 일은 먹성이 좋은 아들은 무엇을 주어도 관심을 보이며 대체로 잘 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며칠 전 남편과 함께 월남쌈을 먹으려고 항정살을 사다 놓았는데 월남쌈을 한 끼 배부르게 먹고도 항정살이 몇 조각 남아 아이에게 구워 주었다. 아이가 잘 먹는다. 순간 나를 짓누르던 이유식의 무게감에서 조금은 해방된 것 같은 안도감이 찾아왔다. 아이가 좋아하고 영양상 크게 문제가 없다면 각자의 형편에 맞게 이유식을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아주 기본적인 깨달음. 생각해보면 누구 하나 이유식에 대해 압박감을 준 적도 없는데 수많은 시판 이유식과 진지하기만 한 이유식 책을 보며 혼자만의 성을 쌓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유식 책을 펴보며 함께 고민하던 엄마는 종종 내가 어릴 때 먹었던 이유식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이유식이라고 특별할 게 없었고 그날그날 시장에 나오는 생선 한 마리 구워서 밥과 함께 먹였다고. 맛있게 잘 먹었단다. 나는 아빠가 처음 교편을 잡았던 작은 어촌마을인 남해에서 태어났고 바닷물이 맑고 먹거리가 풍성한 곳이었다. 막상 엄마 말을 들으면서는 그때는 바다도 오염되지 않아 매일매일 깨끗한 생선을 구워 먹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삐딱한 생각으로 예사로 듣고 넘겼다. 그런데 그 말이 지금에 와서 계속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식을 무척 특별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이유식을 만들면서도 괜히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이 무거우니 오히려 먹거리를 고민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보다는 늘 하던 대로 똑같은 이유식을 만들었던 아이러니. 하지만 이유식이란 것은 어른들이 먹는 음식으로 자연스레 넘어가기 위한 과정이지 특별히 정해진 요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규칙적인 시간에 밥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먹는 것이 즐겁다는 것을 익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먹는 요리에 짠맛을 약간 덜고, 신선한 재료로 만들어준다면야 그것이 좋은 이유식 아니겠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왜 지금에서야 찾아온걸까. 

     

그런 마음으로 잘 살펴보니 아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입맛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직 많은 맛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이기 힘들어해서인지 많은 재료가 한꺼번에 많이 들어간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되도록 다양한 재료를 한꺼번에 넣기보다는 한 두 재료로만 볶음밥을 만들거나 국을 끓여 한 끼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여러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예전에는 소고기에 양배추, 당근, 시금치 등등을 빼곡히 넣어 이유식을 만들었다면 지금은 소고기와 양파, 소고기와 당근 등 하나씩 덜어내고 단순한 조합으로 이유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같은 맥락으로 생선을 매우 좋아한다. 단순한 맛을 좋아해서인지 간을 하지 않은 생선이라도 바다생물 특유의 짭짤한 맛이 있어서 그런지 갈치와 도다리 등 종류를 불문하고 생선 한 마리 구워 쌀밥과 먹는 것을 좋아한다. 야채는 익히지 않은 것을 더 좋아한다. 물론 재료의 특성상 익혀야 하는 야채가 있긴 하지만 익히지 않은 그대로를 먹을 수 있는 파프리카나 당근, 오이 등은 그냥 익히지 않은 채로 적당히 잘라서 놀이처럼 먹여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내가 힘들이지 않고도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생각보다 많다. 별다른 선택지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항정살이나 생선을 구워 밥을 먹일 수도 있고, 냉동해 놓은 소고기와 야채 하나를 볶아줘도 되겠다. 그리고 요즘 인터넷을 하다 보면 신박한 아이템들이 많다. 며칠 전에는 늘 우리 부부의 밥상을 책임져주는 생협의 홈페이지에서 이유식 코너를 클릭해보았더니 밥새우라는 신박한 아이템이 있다. 보리새우의 10분의 1 아니 그보다 더 작은 새우를 말린 것인데 상품을 살펴보니 엄마들의 평이 괜찮았다. 얼른 주문해서 받아보니 새우치고 그리 짜지 않아 주먹밥을 만들어 그 위에 밥새우를 솔솔 뿌려주니 잘 먹는다. 달지 않은 스위트콘도 상비약처럼 냉장고에 늘 준비하고 있다가 이유식 준비가 길어지거나 시간이 필요할 때 아들의 밥그릇에 퍼트려 놓는다. 어쩐지 잔머리만 늘어가는 듯하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져 엄마들에게 더 다양한 이유식을 만들기를 압박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다양한 시제품들이 엄마들의 압박감을 해소한다. 아들의 기호 한 스푼, 시제품 한 스푼, 엄마의 잔머리 한 스푼으로 오늘도 이유식 압박을 요리조리 피해 본다.      


오늘 우연히 무염 생선을 사서 먹일지 그냥 생선을 살지 이야기를 나누는 젊은 엄마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무염 생선이라는 것이 바다 생선을 씻어서 염분을 뺀 것인지, 그냥 소금 간을 하지 않은 생선인지조차 헷갈리는 나는 다시 갈대처럼 흔들리며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이대로 괜찮다. 바다에서 갓 잡아 소금 간도 한 생선을 매일 먹은 나도 건강히 잘 크지 않았나 하는 중년의 궁색한 변명을 되뇌어 본다. 어서 빨리 아들과 같은 식탁에서 같은 밥과 반찬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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