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18개월이 넘어가면서 쓰는 단어들이 눈에 띄게 늘어갔다. 이제 20개월을 넘기고 있는데 예쁜 말, 미운 말 아무런 편견 없이 허겁지겁 먹고 뱉는 아기 괴물이 된 듯 열정적으로 말을 배우고 있다. 며칠 전에는 내가 프라이버시라고는 없는 화장실 양변기에 앉아 혼잣말로 “아 귤 먹고 싶다”를 중얼거렸는데 옆에서 청소용 솔로 장난을 치고 있던 아들이 바쁘게 뛰어나갔다. 또 무슨 소리를 들었겠거니 생각했더니 부엌 테이블에 몇 개 놓여있던 귤을 두 개 가지고 와서 나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양변기에 앉아 귤을 받아 든 나는 순간 울컥했다. 이렇게 많이 컸구나 내 아들.
아들이 내뱉는 말을 쫓아가다 보면 “진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 아주 지극히 찰나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귤을 주면서 “먹어”라고 하던 아이가 금방 돌아서서 가버리라고 한다. 밥 먹기 싫다고 아니야를 격하게 외치다가도 내 팔에 붙어 엄마 팔이 좋다고 하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AI 스피커에게는 닥치라고 한다. 순간순간 마음을 스치는 모든 감정을 짧고 강렬한 말로 쏟아내는 이 생물에게는 모든 것이 진심이다. 좋은 감정도, 싫은 감정도 모두. 나도 어느새 이 아이와 원시적인 소통방식에 익숙해지다 보니 성인들과의 대화가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진심은 날카롭지만 이렇게나 산뜻한 감정이었나 보다. 아들에게서 엄마 팔이 좋다 거나 맛있다, 따뜻하다 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그저 아들이 느끼는 그대로 온전한 감정이 나에게로 온다. 미워, 가버려, 속상해 라는 말을 들어도 아! 그렇구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기분이 상했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으니 서로 조심하면 될 일이다 (물론 안 되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떼쓰면서 가시 같은 말을 내뱉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조심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저 아들이 감정을 던지는 대로 받으면 되고, 받고 나서는 아들의 진심을 확인하고는 그냥 흘려보내면 된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충고한다거나,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말을 쉽게 쓰지는 못할 것 같다. 원래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감정에는 진심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심은 봄바람에 날리는 솜사탕처럼 가벼운 감정이다. 찰나에 스치는 행복감이 조금만 지나도 복잡한 감정들에 휩쓸려 흩어지거나 다른 감정들과 엉겨 붙어 무거워진다. 그래서 진심이라는 감정은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 보다.
나는 이미 타인에게 내 진심을 말하기엔 세상의 소통방식에 익숙해져 버렸다. 내 찰나의 감정을 가볍게 이야기하기엔 너무 무거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단 한 사람. 나 자신에게만은 진심을 자주 얘기하며 살고 싶다. 나의 상황과 나를 둘러싼 많은 이들의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진심이 흘러나와도 틀어막거나 회피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짧고 낯선 감정이라도 소중하게 대하고,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싶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나에게서 점점 독립하고자 발버둥 치고 있는 이 작은 인간에게 가끔씩 찰나의 진심들을 조금 공유해볼 생각이다. 아무래도 아들도 타인이다 보니 조금은 왜곡된 진심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아직 원시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의 유일한 사람이다 보니 욕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