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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Jan 10. 2023

부모의 굴레

오랜만에 남편의 외할머니를 뵈었다. 구순을 바라보시는 나이임에도 어딘가 세련되고 당찬 모습에 마음이 끌리는 분이다. 남편과 아이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조그만 할머니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여유 있게 함께 시간을 보내서였을까? 좀처럼 내보이지 않으시던 속내를 비추셨다. 나의 시어머니를 포함해 4남매를 훌륭하게 키우셨는데도 예순이 넘은 막내아들을 보면 아직도 마음이 아리다고 하신다.      


할머니의 막내아들이자 남편의 작은 외삼촌은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하시다.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니 나는 삼촌의 불편한 다리를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할머니는 어렸을 적 삼촌이 고열에 시달렸고, 급한 마음에 동네 소아과에 가서 열을 성급하게 내려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며 자신을 탓하셨다. 그 어느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았겠나. 누구라도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업고 소아과로 가서 아이의 열을 내렸을 것이다. 다만, 60년 전에는 소아마비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막아줄 백신이 없었고, 치료법도 변변치 않아 할머니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고 설명해본들 소용이 없었다. 이야기를 잠시 끊은 할머니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후 할머니는 삼촌의 불편한 다리를 고쳐보겠다며 병원, 한의원을 전전하셨고 나중에는 아이 다리에 침을 맞을 자리를 찾을 수 없어 치료를 중단하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런지 삼촌은 내가 본 소아마비 환자들과는 달리 보행이 확연히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루하루 시간을 때우듯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그저 아이의 삼시 세끼만을 챙겨주는 것도 버거운 나로서는 이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학교를 가고, 가정을 꾸리고 심지어 황혼에 접어들어도 자식에 대한 연민과 걱정으로 마음의 짐을 이고 살아가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부모의 굴레는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스무 살이 되어 아이가 어느 정도 독립을 하게 되면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벼운 생각을 하다가도 할머니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한 생명을 낳게 된 순간 더 이상 이전의 자유인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시대가 변함에 따라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어김없이 걱정된 모습으로 옆에 앉아 계시는 우리 아빠를 보면 한 세대가 지나고, 두 세대가 지나도 근본적인 관계는 변하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 물론 할머니도 하루종일 막내아들을 생각하며 살지는 않으시겠지만 막내아들의 불편한 다리를 보는 순간, 그 절망적이었던 시간이 되풀이될 것이다. 생이 지속되는 한 무한대로 변형, 재생산되는 악몽같이.     


아이를 낳기 전에는 부모의 굴레가 이렇게 크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니 그것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어쩌면 지금도 무탈하게 커 준 아들 덕분인지 그 절절한 무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가 크면서 크고 작은 일이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내 마음속에는 크고 작은 마음의 짐이 쌓이겠지. 친정 엄마가 내 임신 소식을 듣고 왜 그렇게 미묘한 표정을 지었는지, 내가 둘째 계획을 슬쩍슬쩍 흘릴 때마다 왜 그렇게 펄펄 뛰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자식이 부모의 굴레를 지는 것이 안쓰럽고 가련하기 때문이었겠지. 자식이 부모가 되어 가는 과정을 기쁘면서도 가련하게 지켜보아야 하는 것 또한 부모의 굴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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