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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Nov 18. 2022

자존감의 원천

나는 비교적 낙천적이고 자존감이 높은 편이다. 동시에 극단적으로 내향적인 성격에다가 무엇을 해도 어색하다. 내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도 많았지만 많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성격을 사랑한다. 인생의 전환점을 지날 때 가끔 나의 성격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지만 무탈하게 지냈던 지난 몇 년 간은 내 성격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 그러다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나의 성격과 자존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과거의 내 생각이 내 성격 자체의 약점과 강점에 머물렀다면, 요즘은 나의 성격과 자존감을 키우고 다져준 여러 요인들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 나는 아들의 성격과 자존감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확장된 탓이리라.      


나의 성격과 자존감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단연 엄마다.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양가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엄마는 나를 매우 사랑했고, 지금까지도 일편단심 자식들이 최우선이다. 나도 엄마가 없는 세상은 상상이 안될 만큼 엄마를 사랑하고 아낀다. 하지만 엄마의 사랑은 너무나 강하고 뜨거운 것이어서, 아니 어쩌면 상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방법을 몰랐던 젊은 엄마는 어린 나를 잔인하리만치 짓밟았다. 뜨겁게 담금질하지 않으면 딸이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될까 봐 누구보다 혹독하게 나를 이끌었다. 문득문득 그 여리고 조그만 내가 어떻게 그 길고 잔인한 시간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어두운 시간을 지나오면서도 작은 자존감을 지켜냈고 엄마에 대한 사무치는 깊은 원망을 마음에 심지 않았다는 점은 참 대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젊은 엄마의 그 미숙함이 오히려 안도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오만일까. 어쩌면 아이의 자생력과 자존감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질기고 강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부모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아니 오히려 부모의 미숙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아이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면 나의 꿋꿋한 자존감과 질긴 생명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많은 부분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낙천적이고 생존력이 강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아빠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아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 성격과 자질을 풍성하게 키워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육아 전문가들의 말과도 맞닿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자존감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침범하지 않았던 빈틈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철저히 결과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일이건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내가 독립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었는데 그 공간이 상처받은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영혼의 아지트같은 역할을 해주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결과가 충분하지 않았을 때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 자체도 송두리째 부정당했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들을 드문드문하고 있다가 몇 년 만에 대중목욕탕을 가게 되었다.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목욕탕은 내가 가장 아끼던 일상이었다. 목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목욕탕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자면 빈틈없이 채워지는 그 풍요로운 마음을.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몇 년 만에 찾은 목욕탕은 변함없이 활기찼다. 혼자 한가롭게 온탕에 들어가서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젊은 엄마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딸아이 둘의 등을 밀어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잔잔한 시간들이 마치 머릿속에서 흘러내리듯 떠올랐다.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토요일 저녁마다 목욕탕에서 여유롭게 몸을 씻던 시간. 그리고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씻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아빠를 만나 동네 식당으로 외식을 하러 가던 기억. 나에게 그런 소중하고도 평화로운 시간이 있었다.     

기억은 참 얄궂게도 아프고, 쓰라린 모습을 가장 진하게 남긴다. 그리고 그 진한 기억들 틈에 나도 잊고 있었던 잔잔하고 평화로웠던 시간들이 고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내 자존감의 세 번째 원천은 내 몸에 새겨진 그 잔잔한 시간들이 아닌가 싶다. 일상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지는 별일 없고, 잔잔하기만 했던 시간. 하지만 이미 많은 것들이 녹아들어가 있었던 시간 말이다. 소리 없이 쌓인 일상이라는 시간이 상처 난 자존감을 치유하고, 북돋워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결국 이렇게 머리를 짜내어 내 자존감의 원천을 엉성하게나마 추적해보니 가장 큰 원천은 나 자신이었구나 하는 오만하고도 뻔한 결론에 이른다. 내 인생에는 내 자존감을 해하는 일들도, 자존감을 지키고 키우는 일들도 도처에 있었으니 그 풍성한 재료로 지금의 자존감을 엮어낸 것은 결국 자신이지 않은가. 강렬하고 잔인한 상처로만 내 성격을 물들이지 않고, 잔잔한 시간들도 찬찬히 잘 엮어 지금의 단단한 내가 존재하게 되었구나 새삼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내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것은 풍성하고 건강한 밑천을 가능한 넉넉히 제공하는 것일 뿐. 그리고 아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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