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양곤에 온 지 2주 만에 아들이 아프다. 3월 2일은 농민의 날(Peasants’ day) 공휴일이었던지라 느긋하게 일어나 점심을 먹으러 나갈 채비를 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식당으로 가야 여러모로 안전하다는 말을 들어서 규모가 큰 식당들을 중심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동선이 복잡하지 않으면서 메뉴가 다양하고 규모가 있는 식당인 Jeff’s Kitchen을 선택했다. 양곤에도 여러 지점을 가지고 있는 꽤 큰 프랜차이즈였다.
11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 Jeff’s Kitchen에 도착하자 손님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커다란 방으로 안내받고 테이블에 앉았다. 두꺼운 메뉴판에는 팟타이에서부터 피자까지 여러 대륙을 아우르는 음식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넘쳐나는 메뉴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볶음밥과 오징어 튀김 등등 특징 없는 평범한 메뉴들을 주문했다. 보통 나는 음료를 따로 잘 시키지 않는데 휴일이라 기분을 내고 싶어 남편이 맥주를 주문할 때 수박주스 한잔을 주문했다. 오래지 않아 주스와 음식들이 나왔다. 음식들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양념이 너무 강해 이 음식들을 먹기 위해 다시 이곳을 방문하지는 않을 듯했다.
더운 날씨에 마시는 주스는 언제나 옳다. 수박주스를 열심히 먹고 있자니 아들이 한 모금 달라고 한다. 그래서 나와 아들은 사이좋게 주스를 나눠 마셨다. 주스를 거의 다 마셨을 때쯤이었다. 배가 기분 나쁘게 슬슬 아파왔다. 그렇다고 당장 화장실에 갈 만한 상태는 아니어서 원래 계획했던 영국 식민지시대 총독부 건물이었던 The Secretariat Yangon을 들렀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나는 복통을 동반한 설사를 시작했다. 아들은 그날 이후로 3일 정도의 고열이 계속되더니 해열제를 먹고 열이 내려가자 그때부터 심한 설사를 시작했다. 수박 주스 한잔의 위력이 대단했다. 물론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외 달리 의심을 할 만한 음식이 없었다. 익히지 않은 날 것을 먹은 것은 주스뿐이었으니까. 다행히 한국에서 가져온 배탈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물처럼 흐르던 아이의 변이 3일 만에 멎었다. 응가를 하느라 힘을 주는 모습이 얼마나 고마운지.
아이의 배탈을 겪고 나자 알 수 없는 내 마음의 허기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나쁘지 않은 주거환경에서 싼 물가를 누리면서 사는 일은 꽤 즐거운 일이다. 집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미지의 언어로 대화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과 설렘 뒤에 항상 마음의 허기가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소중한 일상을 더 이상 일상처럼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허기일 것이다.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다는 것. 식당에서 나오는 공짜 물을 아무런 의심 없이 마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몸이 아플 때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병원이 있다는 것. 사람들이 누리는 이 작은 일상들을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물론 산책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의 삶에 큰 타격이 있는 것은 아니며, 안전하게 마실 물은 돈을 주고 사 먹어도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걸리는 작은 병들은 시간이 지나면 차차 자가면역으로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일상을 일상으로 느낄 때의 작은 행복감과 안정감은 삶을 일으키는 큰 원동력이 된다. 초여름 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소중한 사람들과 산책을 하듯 집으로 돌아올 때 느끼는 그 작지만 충만한 행복을 한 번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원동력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오래전, 한국에 온 외국인 친구가 한국 빵이 너무 부드럽고 피자는 토핑이 과하게 많다며 투덜거리던 것을 그저 까다로운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넘겼던 것이 새삼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