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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Apr 26. 2023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아빠가 급성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은 지도 1년 반이 지나간다. 그 사이 아빠는 전원을 한 번 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고령 환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모든 환자들의 상황이 다 다르겠지만 내가 지켜본 아빠의 투병 생활은 힘들고,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도 많았지만 모든 순간이 힘들지만은 않았다. 힘든 시간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순간도, 의미있는 순간도 있었다. 아니 생각보다 많았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지 않았던 아빠는 최근 이상세포 증가 소견으로 또 한 번 힘든 항암을 받았다. 그리고 40여 일 간 입원 중인데 첫 관해 항암시 받았던 약물의 50%만 투입했는데도 많이 힘들어했다. 입안이 헐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입안을 마취하고, 무감각한 상태에서 섭취해야 했다. 무균실 입원인 데다 엄마도 항암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정기적으로 면회를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외로운 항암이었을 텐데도 서서히 체력을 회복해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친정 가족 단톡방에는 아빠의 짠하지만 웃을 수밖에 없는 투병기가 올라온다. 


나에게 죽음이란 항상 추상적인 개념이었지만 이제는 살갗에 와닿을 듯 가까이, 어쩌면 친구처럼 친숙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방금 전, 뻥튀기를 주섬주섬 먹으면서 나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는 엄마의 몸에도 암세포가 이미 많이 번져버렸고, 아빠가 내일 당장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이상한 상황이 아닌 듯 한 신기한 시간들을 경험하고 있다. 죽음이 너무나도 가깝다. 


아빠의 투병이 시작되기 전, 내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떨쳐버리게 된 계기가 있는데 박경리의 토지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아이이 태어나면서 오디오북으로 토지를 듣기 시작했는데 나에게 토지란 그 많고 많은 등장인물들과 함께 많은 사연들을 넘어 죽음에 이르는 시간들을 함께하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세대들이 사회를 끌어가는 주역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비참한 죽음도 있고, 조용한 죽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송관수의 죽음이었다. 백정의 딸과 결혼하여 백정이 아님에도 백정과 같이 살아야 했고, 그 때문에 아내를 많이 생각하면서도 살갑게 대하지 못하였고, 그 배경으로 인해 죽는 날까지 아들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였으며, 몸담았던 독립운동 점조직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다시피 했다. 송관수 본인은 만주땅에 가서 갑자기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죽기 전 아들에게 남긴 편지가 그의 삶을 관통했다. "괜찮다. 다들 불쌍하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만하면 괜찮은 삶이었다 생각한다"라는 말. 죽음과 함께 살고 있는 아비를 둔 자식으로 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 싶은 알량한 마음이었을까. 순탄치 않았던 송관수의 삶도 괜찮은 것이었다면 우리 아빠의 삶도, 그리고 내 삶도 괜찮은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에서였는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두려움을 맞이하면서 내 삶은 그래도 참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는 송관수의 여유가 부러웠다. 신기하게도 본인이 인정한 인생이라 그런지 그 이후로는 송관수의 삶은 참 괜찮았던 걸로 기억된다. 


아빠도 비교적 의연한 자세로 죽음에 임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투병해 보겠노라 다짐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이를 수밖에 없는 종착점인 죽음에 대해 너무 감상적이지도, 너무 잔혹하지도 않게 정리해 나가려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아빠를 많이 좋아했지만 살아오면 부모를 존경한다는 마음이 들었던 적은 없었는데 아빠가 죽음을 맞이하는 조용한 자세에서는 어쩐지 존경심이 생긴다. 나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아빠처럼 조용히, 때로는 유머 있게 죽음을 맞이해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루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쓰고 있는 일기의 일부분을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억하고 잊고 또 추억하는 동물이라는 건 다른 반려동물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렇지만 이번에 경험한 식욕은 좀 특이하다. 며칠 전부터 속이 더부룩하고 울렁증이 심해 항 구토제를 복용할 정도인데 그게 조금 나아지자 음식에 대한 욕구가 일기 시작하더니 차츰 그 실체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게 도다리회였다. 눈물이 나도록 강한 욕구, 이전에 전혀 느껴보지 못한 욕구에 밤새워 도다리 회를 씹었다. 어시장에서 먹었을 때와 집에 갖고 와서 먹었을 때랑 비교하면서. 맛있었다. 회라는 맛이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한참을 씹었다. 물론 소주도  곁들이면서. 그러면서 한편으로 가상의 이 경험이 서러워  눈물이 흘렀다.


음식은 사고를 지배한다는 것을 이렇게 처절히  경험하고 나서 아침이 되자 온몸에 느꼈던 긴장감이 쫙 풀리면서 노곤해졌다. 다음날 아내한테 이 얘기를  하는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고 눈물만 흘리다  왜 그러냐고 묻길래 겨우 도다리냐고 답했다. 한참 동안 함께 눈물을 흘렸다. 지금 옆에 있어도  먹을 수 없는 음식인데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나이가 들면 모두 시인이 된다는 말이 맞았던 걸까. 아니면 평범한 글귀에 평범하지 않은 경험들이 스며들어 특별해지는 것일까. 어쩐지 요즘 엄마 아빠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말에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100세까지 건강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생각보다 일찍 스러져가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는 것 또한 극도로 슬픈 일은 아니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그 가족들을 만나게 되어도 그저 일상의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게 한다.


아빠는 병원 생활이 너무나 지겨웠는지 그림판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가 되려나 보다 하며 농담조로 얘기하곤 하는데 결코 잘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없어도 꽤 의미가 있는 그림이다. 위 도다리 그림은 강렬한 식욕 때문인지 생명력으로 넘치고, 아래 고향집 그림은 어쩐지 아빠의 시간, 우리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그리움이 묻어난다. 내 평생 예술적 재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빠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있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던 볼품없는 저 슬레이트 지붕 고향집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이 고향집 그림의 핵심은 뜬금없이 서 있는 소나무인 듯한데 평생 기품 있게 자란 소나무만 보면 탄복을 금치 않았던 아빠의 작은 염원이 담겨있는 듯하다. 결국 소나무를 많이 심어 몇 개는 꽤 예쁜 소나무로 키워내었으니 꿈을 이룬 셈이기도 하다.  

그리운 고향집

그 아픈 와중에 하필 왜 엘스를 생각했을까. 엘스는 원래 매부가 결혼 전부터 키우던 고양이었는데 여동생이 결혼하면서 식구가 된 우아한 고양이이다. 이 그림에서는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어디에서든 잘 자는 엘스의 귀여움이 살짝 엿보이는 그림이다. 

잠자는 엘스


오늘은 나름의 조용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 아버지의 귀여운 단면들을 담고 싶었다.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가도 시무룩해지기도 하고, 정말 사소한 가족들 걱정들을 하는 아빠의 모습에서 귀여움이란 솔직함에서 비롯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물론 그 솔직함이 다른 사람을 상처 주거나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은 아빠의 따뜻한 인성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오늘도 아빠의 삶을 응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빠가 용감하게,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마음속 깊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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