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은 바다 Feb 27. 2022

살림

육아와 살림은 엄연히 다른 업무이다. 물론 육아 문외한이었던 나는 육아와 살림은 같은 것이라 생각했고, 당연히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단지 육아와 살림은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제 머리 하나 감기도 어려운 야박한 상황에서 살림까지 해내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마치 기획서를 쓰면서 회계 업무를 병행하는 것과 같이 어마어마한 숙련자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나는 기획업무와 회계업무를 해본 적이 없으므로 어마어마한 숙련자라도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살림에 대한 욕심이 생겨난다. 욕심도 욕심일 터이지만 무언의 압박같은 것이 승부욕을 자극한다. 저녁에만 잠시 집에 머무를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때 묻은 살림들이 보이기도 하거니와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그 때묻은 살림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할까 소심한 마음이 밀려오는 것이다. 육아로 인해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살림을 잘 못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줄 알면서도 이상하게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살림이라는 영역에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인터넷 여기저기서 육아와 살림과 본인의 일을 병행하면서 거의 완벽에 가깝게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나를 좌절케 하면서도 마음 밑바닥에 있는 승부욕을 주기적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 깨끗한 편이 아니다. 깨끗하지 않은 내 몸에 대해서도 관대할 뿐더러 깨끗하지 않은 집에 대해서도 관대하다. 참을성이 많다. 로봇청소기가 닦고 지나간 자리를 보며 감탄을 거듭하는 나는 살림 초보다. 그런 내가 하루 걸러 이틀에 한번 정도 밀대 걸레로 바닥청소를 한다. 이것은 비단 살림에 대한 근본 없는 욕심도 욕심이거니와 식욕이 왕성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어쩔 수 없는 숙제와 같은 일이기도 하다. 걸레질을 하지 않으면 굴러다니는 먼지도 맛있게 먹는 아들을 보며 걸레질이란 것이 이래서 필요한 것이구나, 그리고 이틀 만에 걸레질을 해도 이렇게나 많은 먼지가 나오는구나 새삼 깨달음을 얻는다.     


얼마 전에는 냉동실 정리를 시작했다. 아이 없이 마음먹고 한다면야 한두 시간 정도에 다 끝날 일이지만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정리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는 아이가 얌전히 앉아있길래 냉동실에 있던 떡국떡을 빈 용기에 주섬주섬 넣는 중에 떡국 떡에 붙어있던 얼음 부스러기가 아들 머리에 떨어져 미안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냉동실을 정리해 갔더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맛에 살림을 하는 것이구나. 조금만 부지런히 시간과 몸을 쓰면 이렇게 작고도 큰 성취를 이뤄낼 수 있는 것을. 

     

냉동실 정리가 끝나자 냉장고 정리가 하고 싶어 졌고, 냉장고 정리를 시작하자 싱크대 밑 선반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냄비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더러운 것에 관대한 사람인데 요즘 성취감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여 작은 성취에 집착하게 되는가 보다. 하지만 너무 살림의 묘미에 빠지지 않기로 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살림에 쓰는 시간이 너무 많다 보면 아이와 놀아줄 시간, 나를 위해 한 글자라도 더 쓸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육아가 단조롭고 고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살림이 재미나는 슬픈 현실. 아이와 놀아줄 것이냐 설거지를 할 것이냐 남편과 치열한 가위바위보 끝에 삼세판을 다 이겨버린 나는 주저 없이 설거지를 택했다. 아마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설거지하고 음식 쓰레기 봉지를 버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나를 보며 아이와 놀고 있던 남편이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잠시나마 살림으로 회피하고 싶은 심정을 누구보다 공감하는 웃음이었으므로.      


육아와 살림. 나는 오늘도 호시탐탐 살림의 영역을 넘보며 육아의 굴레에서 놓여나고자 작은 발버둥을 친다. 그렇지 못할 때는 얼마 남지 않은 이사를 생각한다. 새로 이사 간 집에 어떤 커튼을 달까. 거실에는 어떤 가구들을 어떻게 배치할까. 인덕션을 처음 써 보는데 괜찮을까 하며. 얼마 되지도 않은 세간살이에 대한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살림 중독은 이렇게 조용히 시작되나 보다. 

작가의 이전글 반복과 변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