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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Feb 27. 2022

그 가을의 일주일 1편

진단

이 글을 쓴지도 벌써 3달이 넘어간다. 다행히 아빠는 힘든 항암 과정을 잘 이겨내고 있다. 누구보다 강한 것 같지만 여린 엄마와 하늘하늘 여린 듯 하지만 누구보다 강단 있는 아빠를 응원하는 마음은 3달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싸워서 승리한다는 생각보다는 이 끈질긴 동반자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온 가족이 마음을 모아 궁리하고 있는 요즘이다.   


사랑하는 아빠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고 한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고통스러운 그 가을의 일주일을 기록한다는 것이 아직 힘겹지만 이 또한 우리 가족의 애틋한 추억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기록에 남긴다.

  

그러니까 한 달 전 한약을 먹고 소화가 안된다며 갸우뚱하던 아빠. 엄마와 나는 그저 한약 때문에 온 명현반응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증세가 점점 심해지더니 숨이 찬다고 하여 걱정이 된 엄마가 아빠에게 동네 내과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동네 내과에서 혈액검사를 하고 온 날 아빠는 힘이 없고 몹시 피곤해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그저 몸살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빠가 들고 온 혈액 검사지에는 무시무시한 결과가 적혀 있었다. 적혈구 감소, 백혈구의 급증, 혈소판 급감 증세가 있어 혈액암 소견이 보이니 빨리 대학병원에서 정확한 진단을 받으라는 진단서도 함께였다. 그 진단서를 받아 들고 순간 숨이 가빠오고 머리가 하얘졌다. 같이 있던 엄마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빠, 엄마, 나 그리고 갓 8개월이 된 나의 아들. 이렇게 네 명은 좁은 집에 둘러앉아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흐느낌도 없이 우리 가족에게 갑자기 몰려온 엄청난 불행을 조용히 외면했다. 그날 저녁, 엄마는 오랜 침묵을 깨고 이 진단서가 확진은 아니지 않냐며 오진 가능성도 있을 거라는 말을 되뇌었다. 나도 하나의 가능성이지 충분히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며 자위했다. 하지만 아빠가 받아온 혈액검사 결과에 적힌 수치는 정상수치 표준편차 범위를 한껏 벗어나는, 혈액암이라는 무시무시한 병명에 걸맞은 당황스러운 숫자였다. 그렇게 작은 징후들은 우리가 외면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동네병원에서는 혈액검사 결과가 나온 바로 다음날 대학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님 외래를 잡아주었고, 아빠는 대학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2021년 10월 29일 금요일, 엄마와 아빠는 혈액검사 결과를 들으러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공교롭게 오래전 잡아두었던 제주여행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외래시간 1시간 후에 맞추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좋은 결과가 있었더라면 끝나자마자 내게 먼저 전화를 걸었을 텐데 외래 시간 1시간 후에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건 좋은 징조는 아니다. 그렇게 불안한 시간이 지나고 비행기가 이륙하려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고, 이륙하기 직전이라 이번에는 내가 전화를 받지 못하였다. 불안은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 시간의 길고 긴 비행이 그렇게 지나갔다. 다행히 아들의 첫 비행은 통잠으로 끝이 났고, 평소라면 그런 아들을 기특하게 생각했겠지만 나의 마음은 내내 제주가 아닌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켰는데 엄마의 길고 긴 카톡이 남겨져 있었다. 첫 문장은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문장이었다. 알고 있었다. 모든 징후들이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왈칵 설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데 길고 긴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짐 찾는 곳에서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입국장 문이 열리면 쏟아져 들어올 휴양지의 밝은 기운이 두려웠다. 언제까지나 우리 가족에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이, 하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입국장 문을 지나니 우리를 마중 나온 지인이 밝은 얼굴로 맞아주었다. 사실 입국장 이후 4박 5일 동안의 제주여행을 어떻게 마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따뜻한 지인 부부의 보살핌으로 5일을 옹골차게 버티면서 제주여행을 이어나갔고, 어쩌면 제주여행 덕분에 엄마 아빠도 부산스러운 손자 없이 조용히 입원 준비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을 해도 가슴이 서늘하고, 먹먹했다. 제주공항에서 지인네 집으로 가는 길에 라디오 DJ가 오늘같이 청명한 날은 생애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이 가을 날씨를 만끽하라고 하는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아프게 다가왔을까. 마지막을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너무나 큰 사치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아무렇지 않은 말, 행동에 이미 맥없이 녹아버린 마음은 제멋대로 할퀴어지고 있었다. 해가 떠있는 밝은 낮 시간 동안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버틸 수 있었는데 밤이 되니 마음이 터져버린 듯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4일 밤을 울었더니 조금 후련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참 감사하고 다행하게도 아빠는 확진받은 날로부터 3일 후 입원하여 바로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이 모든 과정이 엄마아빠가 손자를 봐준다면서 5월부터 우리집 근처에 원룸을 얻어 나와 함께 육아를 하던 중에 생긴 이변이었다. 제주에서 돌아온 나는 아빠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집에 젖먹이 아들과 둘이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살아오면서 내 마음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던 터라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과 몸서리치게 만드는 외로움은 생소한 감정이었다. 내 마음은 위험했다. 아들을 보면 한여름에도 손자를 안고 비행기를 태워주던 아빠의 모습이 아른거렸고, 집 창문에는 모기 때문에 아빠가 설치해 놓은 어설픈 모기장이 있었다. 제주여행 직전, 오한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누워있던 아빠의 여윈 등도 생생한데 나는 아빠의 흔적 한가운데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있었다. 이 흔적들과 싸울 힘도, 앞으로 다가올 길고 긴 시간을 헤쳐나갈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생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고 집요하다. 아빠는 생사를 다투는데 나와 내 새끼는 수시로 배가 고프고 잠이 왔다. 그리고 나는 내 생명과 내 새끼의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 책임과 무게감이 나를 짓눌렀고, 더 큰 절망감을 안겨줬다. 다행히 나의 위험한 마음을 감지했는지 남편은 얼른 육아도우미를 구하라고 했고, 경험 많으신 도우미분이 일주일에 몇 시간을 함께해 주셨다. 아들의 낯가림이 심할 때라 사실상 육아는 변함없이 내 몫으로 돌아왔지만 이모님과 얘기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허물어 없어졌던 마음이 다시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 긴박했던 일주일은 우리 가족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지만 남편과 제주의 따뜻한 지인 부부, 생면부지의 이모님,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말없는 응원으로 무사히 하루하루 버티어 지금이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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