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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Mar 10. 2022

그 가을의 일주일 2편

항암

그렇게 숨 가쁜 일주일이 지나고 아빠의 1차 항암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물론 순식간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다. 항암이라고 하면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적어도 하루 이틀, 주치의와 상의하는 시간 하루 이틀 정도는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10월 31일 일요일 입원, 11월 1일 월요일 골수검사 후 바로 항암제가 들어갔고, 일주일 후인 월요일 1차 항암이 끝이 났다. 물론 아빠의 옆을 24시간 지켜야 했던 엄마는 그 일주일이 너무나 길었다고 한다.      


아빠의 항암 부작용은 맹렬한 것이었다. 백혈병 확진 전에 전조증상으로 있었던 변비가 더욱 심해져서 변비약을 8개나 먹고도 반응이 없어서 결국 좌약을 쓰고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변비 때문인 줄 알았던 복부 팽만감은 변비와는 또 별개인 것이어서 변비가 풀리고서도 배가 점점 부풀이 올라 항암이 끝나고 이틀 후 CT 촬영을 했다. CT를 찍기 전, 엄마에게서 전화를 달라는 연락이 왔고 나는 내심 기대했다. 좋은 소식이 있구나. 엄마가 웬만해서는 전화를 달라는 말을 먼저 꺼내지는 않는데 좋은 소식이라 나에게 시간을 내어 전하고 싶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엄마는 나에게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하지 않겠냐는 무거운 말을 꺼내기 위해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CT 촬영은 아직 하지 않았지만 아빠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아빠의 모습은 엄마에겐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고, 그만큼 절망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제왕 절개했을 때도 손하나 까딱하기 싫어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었다며 어설픈 이야기로 엄마를 위로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엄마의 절망감은 단순히 아빠의 무기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500 수준 밑으로 떨어지면 심각한 상태라는 호중구 수치가 70대를 밑돌면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간에는 물이 많이 차 있었다 한다. 엄마도 큰 딸에게 전화를 하여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하지 않겠냐고 담담히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현실이 믿기지 않아 상황을 소상히 전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번 크고 작은 심리적 고비가 있었다. 호중구 수치가 2주가 넘도록 100 미만인 데다 배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기만 하여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엄마의 말을 들었을 때, 전공의 선생님이 CT 촬영 결과를 보고 폐까지 복수가 차고 폐 결절이 보인다고 했을 때, 그럴 때마다 무너질 마음이 또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그 새 돋아난 희망의 마음이 또 하염없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새로운 소식도 없을 엄마에게 아침마다 넌지시 카톡을 보내 마음에 희망을 채워줄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부여잡고자 걸식하듯 매달렸다. 그저 아빠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겠지만 나의 알량한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엄마를 괴롭혔다.      


그렇게 3주. 놀랍게도 아주 조금씩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안정을 찾아갔다. 엄마도 어느새 병원 생활에 적응해갔고, 주위 보호자분들과도 이야기를 하면서 속풀이를 하는 듯했고, 나도 반복되고 특별할 것 없는 일과지만 요일별로 해야 할 일들을 채워가며 같은 듯 매일 다른 일상을 채워갔다. 아빠가 아프고 난 후 처음 아들을 데리고 짐보리를 가던 날, 항상 차로 태워주던 아빠의 살뜰한 마음을 기어코 되새김질하면서 혼자 마음이 시렸지만 이제는 그저 이렇게라도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하게 되었다. 집으로 놀러 온 지인들에게는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아무렇지 않게 아빠의 투병소식을 알렸다. 위로받고자 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나의 무거운 짐을 잠깐이나마 나누고자 하는 알량한 마음이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지인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였거나 하고 있었고 나의 마음을 다독여줬다. 그 사이 아빠의 호중구 수치는 천으로 오르더니 그 다음날 7천으로 올라 관해 여부를 알아보고자 다시 골수검사를 했다. 다행히 1차 항암에서 관해가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오랜만에 마음 한편을 우두커니 차지하고 있던 돌덩이가 조약돌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아직 끝난 싸움은 아니지만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마음에 스미었다. 하지만 간과 폐에 찬 복수가 빠지지 않았고 간에 찬 복수는 한번 빼내고 폐에는 삽관을 하여 수시로 복수를 빼내느라 아빠는 긴긴밤을 고통과 함께 보내야만 했다. 그래도 아빠는 음식을 잘 먹어내었다. 우리 모두 퇴원을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폐 복수가 좀처럼 잡히지 않아 기약 없는 입원생활은 계속되고 마음을 접을 때쯤 예고 없이 퇴원하라는 통보가 왔다. 12월 1일 퇴원 통보가 온 다음날 바로 퇴원수속이 진행되었는데 그렇게 기다려온 퇴원 소식인데 막상 병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켠으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막상 긴 병원생활에 이력이 난 아빠와 엄마는 잔잔한 기쁨에 설레는 목소리였다. 한순간에 엄마 아빠의 평화로운 일상생활은 기약 없이 멀어졌고, 더 이상의 나쁜 시나리오는 없다고 생각할 만큼 절망으로 가득 찬 나날들이라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작은 기쁨에 웃고 설레는 것을 보면 인간은 낙천적인 동물이다.      


그렇게 퇴원 다음날, 엄마 아빠는 손자의 육아 도우미를 자처하며 얻어 놓은 3평짜리 원룸에서 긴긴 단잠을 자고 점심을 먹기 위해 제대로 된 부엌이 있는 우리집으로 걸어 내려왔다. 사실 내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어서 오랜만에 아빠를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데 마당 쪽 창문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붉은 털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여위고 검디 검은 남자가. 살이 많이 빠졌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얼굴이 검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였고 그리고 퇴원 소식에 들떠 있어 아빠가 어떤 모습일지는 사실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간 마음에 동요가 일었다. 우리 아빠가 많이 힘들었구나.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의 모습이 저런 것이구나. 가슴이 턱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멍하니 창문에 비친 아빠의 모습만 바라보고 있는데 현관을 열고 들어온 아빠를 9개월 된 아들이 해맑은 미소로 반긴다. 그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이렇게 웃으며 만날 수 있는 것도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아빠의 목소리와 손짓에 아들은 연신 까르르 웃었다.

     

모자를 벗은 아빠의 모습은 더 충격적이었는데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머리는 내 머리보다 더 작았고, 볼품없었다. 나이가 많아 근육도 잘 생기지 않을 텐데 수십 년간 성실하게 조금씩 쌓아온 온몸의 근육이 일주일의 항암으로 다 빠졌단다. 내 마음도 이렇게 헛헛한데 아빠의 마음은 더 허무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애써 그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아빠는 우스갯소리로 한 달 동안 샤워를 하지 못하여 온몸이 비늘로 덮여있는 거 같다고 했고, 그렇게 퇴원 후 첫 샤워를 마치고 다시 태어난 거 같다면서 빙긋 웃었다.  

   

아빠는 생각보다 강인한 사람이었다. 퇴원한 그 다음날부터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걸리는 한의원을 매일매일 다녀왔다. 물론 대학병원 담당 교수님은 한의원에 다니지 말라고 했지만 20년 우리 가족 주치의였던 한의원 선생님은 이제 아빠에게 주치의 이상의 심리적 지지자였다. 그것을 알기에 엄마도 묵묵히 걸음을 함께 했다. 평소 침을 온몸에 놓던 한의원 선생님은 아빠 몸을 깨지기 쉬운 도자기 다루듯 살살 주무르고 필요한 곳에만 침을 꽂았다고 한다. 그 대신 아빠에게 놓지 못하는 침을 엄마에게 살벌하게 놓았다고 하는데 선생님 치료법은 종종 이해불가다. 그래도 그 덕분인지 갑작스레 시작했던 간병생활로 허리 통증과 어지럼증을 호소하던 엄마도 많이 나아졌고, 아빠 눈에도 생기가 생겼다. 


그렇게 어느덧 2주가 지나 아빠의 안색은 검푸른 빛에서 생기가 돌았고, 얼굴에 살이 올랐다. 그리고 12월 21일 두 번째 외래. 다행히 피검사 결과는 지극히 정상 범주였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2차 항암을 시작하자는 교수님의 말씀이 있으셨다. 아빠는 일주일 정도 더 집에서 머물면서 한의원 치료도 다니고 운동도 하며 살도 조금 더 찌우고 항암에 임하기를 원했지만 모든 것은 병원 일정에 맞추어야 하니 이런 것들은 병원에 요구할 수 조차 없었다. 그래도 그 사이 아빠의 몸무게는 1.5 키로 늘어나 있었다. 12월 24일. 야속하게도 크리스마스 이브날 두 번째 항암을 위해 입원을 했고,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저녁에 항암에 들어갔다. 이번 항암은 일주일 내내 항암제를 투여하던 1차 항암보다는 일정상 가뿐했다. 아침저녁으로 두 시간씩 일주일에 3일만 항암제를 투여하는 일정이었다.


항암제 투여는 무탈하게 끝났고, 항암제의 영향으로 면역이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2주일이면 퇴원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하던 아빠의 농담 섞인 말은 그저 초짜 환자의 희망사항이었나 보다. 입원 기간 동안 크게 불편한 곳은 없었지만 몸에서 대장균이 검출되어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항생제를 10일 연달아 맞고는 한 달을 채우고서야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첫 항암을 마친 후 죽음의 기운이 역력했던 얼굴이 두 번째 항암 후에는 생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 삶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 어느덧 긴 항암이라는 여정의 반쯤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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