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죽음은 내게 너무나 큰 절망 그 자체이지만 막상 엄마가 가장 절실한 순간은 아주 평범하고 소소한 시간들이다. 퇴근하면사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나 엄마가 만든 저녁을 다 같이 둘러앉아 먹는 그런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너무나도 절실하다.
엄마와의 대화는 항상 그립다.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는 원래 신나고 재밌는 법인가 보다. 40년을 함께 하다 보니 이제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엄마는 내게 어떤 조언을 할지 추측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뻔한 이야기를 엄마의 목소리로 직접 듣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빠지는 일인지.
엄마와 나는 평소에도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다. 하지만 둘 다 멋쩍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으레 서로의 마음을 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고맙다, 감사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왠지 엄마가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나서는 조바심이 났다. 적당한 틈이 보이면 수시로 칭찬과 감사 세례를 퍼부어야지 했다. 하지만 참 무엇이 그리도 어려웠는지 수시로 퍼붓기는커녕 번번이 때를 놓치고 말았다. 그게 지금도 참 아쉬울 뿐이다.
첫 번째 수술을 며칠 앞두고 퇴근길에 엄마와 전화를 했었다. 내가 뜬금없이 그런 얘기를 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부모가 아이에게 큰 사랑을 베푸는 일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고. 부모가, 혹은 조부모가 아이를 대하는 모습에 관심을 갖다 보니 내가 받았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는 그런 얘기. 그래서 고맙다는 얘기를 하려는 찰나 엄마는 허허 거참 그걸 알아차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구나, 너희 둘은 내 인생에 전부였는데. 그 말을 하는 엄마의 말에 약간의 아쉬움과 자부심, 애환이 묻어 나와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그래서 또 고맙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후에 영영 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얼마나 엄마를 신뢰하고 좋아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엄마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항상 엄마의 뻔한 응원과 무조건적인 지지를 듣기 위해 미주알고주알 고민을 털어놓던 많은 시간들을 생각하면 엄마에게 뻔한 감사와 사랑을 전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쉽다. 누군가의 마음과 말을 짐작하는 것과 그것을 직접 듣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대화 속에 나는 왜 조금 더 따뜻한 사랑을 담지 못했을까. 이제 엄마가 떠나버렸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응원을 보내는 일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그 시답잖은 교훈을 얻기 위해 너무나 큰 희생과 아픔을 치러내야 하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참 무지몽매한 인간이다.
엄마의 목소리,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그립다. 우리 아들이 눈웃음만 지어도, 어린이집에서의 시답지 않은 에피소드만 들려주어도 그렇게나 좋아하던 엄마가 지금 아이가 한 뼘, 두 뼘 커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엄마를 상상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 현실이 아직은 너무 가혹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