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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 바다 Nov 21. 2023

마음의 위안은 마음의 위안일 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부터 ‘기관’의 힘을 믿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을 학원 뺑뺑이를 돌리면서 그래도 집에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더 배우겠지 생각하며 위안하는 부모의 마음을 말이다.     


출근 전 한 시간, 그리고 퇴근 후 2~3시간 정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아이의 밤잠시간이 된다. 오늘도 이렇게 무사히 하루가 끝나는구나 생각하며 아이와 함께 잠이 든다. 그러다 문득, 불안감이 엄습한다. 누구네 집은 책육아를 한다 하고, 어느 부모는 아이와 하루종일 창의적인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는데 나는 그저 시간을 때우듯 아이와 함께 어영부영 놀고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든다. 그러다 어린이집을 떠올린다.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면서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담은 어린이집의 사진들에 큰 위안을 받는다. 집에서 못하는 활동들을 어린이집에서 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마음의 위안을 건넨다. 수많은 아이들이 거쳐간 어린이집이니, 수많은 아이들을 가르쳐본 선생님들이니 나보다 낫겠지 하는 생각.       


요즘 아이가 부쩍 선생님 놀이를 하자고 한다. 본인은 선생님이 될 테니 엄마는 선생님의 지시에 맞춰 대답을 하란다. 나도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지시를 하고서는 해보라고 할 때는 당황스럽다. 그래서 태연히 아무거나 하다 보면 어김없이 호통이 날아온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오다 나중에 가서는 “아니야, 아니야” 고함을 치고, 울면서 선생님 놀이는 끝이 난다. 그래도 몇 분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선생님 놀이를 하자고 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신기한 마음에 선생님 놀이를 몇 번 하다 보니 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지시를 따라오지 못하면 선생님들은 저렇게 화를 내는 걸까. 타이르거나 상황을 설명해 주기보다 그저 단호하게 “아니야”라고 무섭게 얘기하는 걸까 하고. 물론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면 이렇게 선생님 놀이를 좋아할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이런 행동들이 나 스스로에게 건네었던, 어쩌면 막무가내식의 마음의 위안을 다시금 살피는 계기가 된 것은 맞다.        


‘기관’은 기관일 뿐이라는 것. 내가 낳은 자식도 때로는 버겁고, 화가 나는 일이 많은데 매일 직장에서 교사와 학생으로 만나게 되는 아이들에게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내 아이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아이를 한꺼번에 돌보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난이도는 배가된다. 부모로서 나는 어린이집에 보내는 시간 동안 기본적인 교육과 안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당당히 요구할 권리가 없다. 물론 교사로서의 다년간 경험으로 아이를 더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는 있겠지만 그 외 사랑과 교육은 오롯이 부모의 몫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이 점점 늘어나고, 복잡해질 것이다.  


아이를 테트리스처럼 촘촘하게 쌓듯 학원에 보내고 싶은 부모는 별로 없다는 점을 깨달은 것도 아이를 낳고 난 이후이다. 내가 살뜰히 보살피고 싶지만 맞벌이를 하는 부모, 혹은 현실적으로 가정 보육이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학원을 대안으로 삼는 부모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 떠밀려 학원에 보내기 시작했을지라도 학원에서, 혹은 다른 교육기관에서 하나라도 더  배워올 것이라는 마음의 위안은 조용히 찾아온다. 그 소극적 위안이 어느새 자기세뇌가 된다. 그리고 촘촘하게 일정을 짜면 짤수록 아이는 더 많은 것을 배워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하지만 성인인 나도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데 아이들의 집중력이 이 빽빽한 일정을 무사히 버텨내 줄 리 만무하다. 3살도 안된 아이의 일정표에 짐보리 시간표를 무심코 욱여넣다가 아차! 마음의 위안은 마음의 위안일 뿐 현실은 조금 더 냉정하게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학원, 혹은 기관만이 아이의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시간의 공백을 어떻게 채워 넣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보다 더 시급한 보호자 없는 이 육아 공백을 어떻게 채워 넣을 것인가가 바로 당면한 문제로 돌아온다. 아이를 편하게 맡길 수 있는 친정이 완전히 무너진 나에게는 한층 더 큰 압박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편하게 맡길 수 있는 친정과 시댁이 있다 한들 이 고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아이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부모밖에 없다. 그리고 아이의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에 맞게 삶의 방향을 이끌어줄 수 있는 것도 부모다. 방향이 어느 정도 세워졌다면 필요한 능력을 천천히, 지속적으로 키워줄 수 있는 것도 결국 부모다. 그 노력의 과정에서 기관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와 부모가 함께 방향을 찾는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엔진만 급하게 돌려본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고 헤맬 뿐이다.      


허겁지겁 아이를 키우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나는 오늘도 허겁지겁 인생을 살면서 기관의 힘을 믿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아이가 어린이집에도 잘 적응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문제를 직시하기가 두렵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그저 그대로 인생을 빙빙 돌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발목을 잡아 왔다는 것을.

     

일단 내 속도에 따라 바쁘지만 차분하게 살아갈 것. 차분한 가운데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의 방향, 그리고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역량과 자질이 어떤 것인지 곱씹어 생각해 볼 것.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 그 방향으로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천천히 생각해 볼 것. 지금 내가 다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기관의 능력을 맹신하지 않고 인생의 선배로서 함께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부디 이 고민의 끝에 차분하게 성장한 나와 즐겁고 왕성하게 성장한 네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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