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함께 사는 세상

by 아무

-시금치의 한살이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3월 무렵, 맨땅에 홀연히 새싹을 키우며 자기 홀로 꿋꿋이 자라던 시금치가 생명을 다했다. 지난해 누군가의 입맛을 책임지다가 씨앗을 흙 속에 묻고 올해 봄, 내 밭에서 자라난 시금치야~ 네 덕에 3, 4월 알차게 시금치나물을 무쳐 먹을 수 있었어. 씨앗을 받아 내년에도 만날 수 있길 바랐지만, 그건 내 욕심이겠지. 수많은 밭 중 내 밭에 내 시금치로 자라줘서 고마웠어. 넌 정말 맛 좋은 시금치였어.

생명을 다한 시금치 줄기를 잘라 바질 옆에 뉘어주었다. 이런 게 상생 공생일까?





-함께 사는 세상

식물을 키우면 수많은 곤충을 보게 된다. 이렇게 다양한 벌레와 함께 사는 식물들, 어쩌면 우리 인간도 이들과 함께 사는 지구 상의 생명체 중 하나일 텐데 어찌 이렇게 학살(?)하고 망가트리고 인간들 맘대로 지구 환경을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3평 남짓 좁디좁은 땅에서 자라나는 식물들과 함께 먹고사는 곤충과 씨앗이나 새싹을 먹는 비둘기 떼를 보면서 인간사를 되돌아본다.



같이 공유하던 지구라는 이 공간을 어느 순간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대로 망가트리면 안 되는 거다. 텃밭을 직접 가꾸기 전엔 징그럽고 피하고 싶은 벌레였지만, 내가 가꾸는 식물들에 찾아오는 곤충들을 보면서 이들은 원래부터 함께 살아왔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키운 식물들을 함께 먹고사는 애벌레의 유충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목초액을 뿌려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잎사귀 몇 장 아니, 조그만 구멍 하나 먹을 텐데, 함께 잘 먹고 잘살면 되지 않을까. 식물 곤충 동물 모두 함께 사는 세상에 인간들은 각자 자기 의지대로 살아간다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함께 사는 수많은 존재의 희생이 뒤따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것들은 조금 징그러웠다. 이쁘게 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쌩쌩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물과 햇볕, 눈에 보이는 건 그 둘 뿐이다. 인간으로서 흙 속 양분은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알 길이 없다. 그 둘은 어떤 존재이길래 식물을 이렇게 튼튼하게 자라나게 할까. 날이 갈수록 자라나는 식물들을 보면서 신기하고 감사할 뿐이다. 물의 양이 적으면 시들시들 본인에게 부족함을 이야기한다. 그럼 그 반응을 살펴 나는 물을 주면 된다.





-구멍이 뽕뽕 뚫린 잎사귀들

곤충이나 애벌레나 사람에게나 맛있는 건 매한가지인 듯 가장 맛 좋고 부드러운 어린잎을 벌레들도 좋아한다. 특정 잎사귀에 더 많이 붙어있는 벌레와 구멍들. 여기서 자라는 99% 식물들을 내가 다 먹을 텐데, 1% 정도는 함께 나눠 먹어도 괜찮겠지. 맛있게 먹으렴. 내 몫도 조금은 남겨주길. 아직 나도 맛보지 못한 청겨자를 너희가 다 먹어버렸다는 걸 기억하렴.







-삶과 죽음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지는 것들을 보면 안타깝지만, 적자생존의 이치(?)를 다시금 느낀다. 인간사가 그렇듯, 너희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생명을 다하면 다른 생명체들에게 거름이 되어 보탬을 줄 테니까 더는 슬퍼하거나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려 애쓰지 않으려 한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 살아있는 것들에 보탬이 되어주기를.



복잡다단한 하루를 살아가다가 텃밭에 오면 세상사가 다 허망해진다. 고민 따위 다 무슨 소용 있나. 잘 자라나고 있는지 부족한 건 없는지 관리해야 할 식물들이 이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당장 뜯어먹을 먹거리가 있고, 상한 잎사귀를 따주면 그뿐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방금 지은 밥에 쌈장을 곁들여 맛있게 먹으면 된다. 행복이 별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