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과 경계 어딘가에서
유의미한 하나의 루틴을 만드는 데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루틴이 깨지는 건 순식간이다. 매일 아침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알찬 오전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는데 몇 달 전부터 아주 게을러졌다. 조바심이 난다거나 불편하지 않은 게 문제다. 생산적이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이 좋다. 이렇게 고요하게 머물러 있는 행위가 좋다. 바쁘지 않고 쫓기지 않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면 좀 어떤가 싶기도 하고. 지금만큼 나만의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
선물 받은 드립백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내 돈 주고 커피를 사 먹지 않은지 꽤 되었다. 커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닌 지 3~4년쯤 되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안부를 전할 때 커피 선물을 종종 받는다. 사실 나는 카페인에 약해서 커피를 자주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어느새 커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3~4년쯤 꾸준함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러한 이미지로 각인되었나 보다.
독서모임과 명상, 운동을 일상에서 놓은 지 넉 달째 되었다. 바쁘디 바쁜 연말과 년 초를 보내느라 독감에 걸려버렸고, 수습하고 나니 코로나19 덕에 정신을 못 차리는 시기를 보냈다. 걱정하고 대처하고 수습하느라 일상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오랜만에 커피를 내리고 사진을 찍고 자리에 앉으니 나를 향해 내리쬐는 아침햇살이 오늘따라 어색하다. 매일 아침 저곳에 있던 밝음이 새롭게 느껴진다. ‘어제도 저랬던가?’
난 언제나 바빴다. 다이어리에 기록된 ‘투 두 리스트’를 체크하고 다음 스케줄을 기록하는 삶을 사느라, 다른 사람들처럼 알차게 시간을 쪼개 쓰느라 바빴다. 쉼이 없었다. 하지만 남들 보기에 내 삶이 숨넘어가듯 정신없어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생각 후 행동하기를 즐기는 내 생활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겉으로 보기엔 별 차이가 없이 느릿느릿할 것이다. 하지만 예전엔 매 순간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걱정하고 고민하고 생각하느라 분주하고 복잡했다면, 요즘은 그저 지금, 이 순간 멍 때림을 즐긴다. 코로나는 오롯이 나를 향한 쉼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그게 가능해졌다. 느리게 생각하는 이 시간.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시간에 조바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가 마냥 좋다.
집착
유난히 커피 맛에 집착하던 시기가 있었다. 크레마가 무엇인지, 산미는 무엇인지, 핸드드립과 에스프레소 머신의 차이는 무엇인지, 싱싱한 원두를 바로 갈고 내리면 얼마나 맛이 좋은지 알게 되면서 스타벅스나 카누, 맥심 같은 국민 커피와 멀어지게 되었다. 한 잔을 마시더라도 정말 좋은 걸 마시고 싶어서 비싸도 커피 자부심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무슨 커피 비평가인 양 커피 맛을 평가하고 순위 매기며 ‘더 좋은’ 커피를 찾아다녔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과거 이야기이다. 지금도 여전히 맛 좋은 커피가 좋지만 예전보단 가벼워졌다.
그저 따듯한 물 한 잔이라도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공간에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하다.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사소한 순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적어도 커피에 대해서는. 1도 모르면서 나 혼자 다 아는 척 평가하고 심판했던 모습이 우습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나의 천성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선천적으로 미식가는 아니다. 커피 역시 그랬다. 분위기와 습관으로 마시는 것이지 엄청난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굳이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는 혼자 보내는 시간도 충분히 의미 있고 행복하다. 관계를 위해 의미 없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건 나와 주변을 산란시킬 뿐이다. 허공을 맴도는 바람과 공기 같은 그런 관계에 목메어 나를 흔들리게 놔둘 것인지, 적당한 경계로 그 틈에서 빠져나와 나의 위치를 찾아갈 것인지, 그건 분명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나이가 들수록 삐딱하던 내 모습을 알아가는 게 좋다. 이렇게 조금씩 어설픈 꼰대로 늙어가는 내 모습이 불편하지 않다.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지만, 채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도 좋고.
햇살을 맞으며 별의별 생각을 떠올리는 이 시간은 내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선물해준다. 유난히 나를 돌아볼 시간이 많은 올해 봄은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을 알게 해 주었다. 매일 아침 태양은 나를 향해 비춘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매일 나를 향해 내리쬐는 햇살을 즐기는 건 내 몫이다.
오늘 아침, 커피 한 잔으로 한가득 딴생각을 풀어낼 수 있어서 이 소중한 시간이 참 좋다. 딱 그만큼이다. 내게 커피는 딱 그만큼 감사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