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시작하다
언니도 이제 늙었다.
학창 시절 같은 반 친구들 이름을 ㄱ, ㄴ, ㄷ 출석 번호순으로 외우던 그녀는 꽤 괜찮은 기억력을 지녔었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동네를 지나가는 대부분의 버스 노선을 알고 있어 ‘걸어 다니는 내비게이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던 쓸데없는 기억력의 소유자, 그녀가 변해간다.
학교나 회사에 가지 않는 주말이면 도서관이 내 집인 듯 드나들며 학구열을 불태우던 그녀는 운동 스케줄도 요란했다. 풀코스 마라톤을 준비하며 100일 계획을 세운 그녀는 다치지 않고 즐겁게 운동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계획표대로 채워가는 삶을 좋아했던 것 같다. 차곡차곡 계획을 더하던 삶을 살던 그녀의 인생이 방향을 잃게 된 건 한순간이었다. 또래보다 과한 업무나 육아로 치이는 것도 아닌데 한두 번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다시 돌이키기 버거워졌다. 회복탄력성이 떨어졌다. 언제나 계획한 대로 흘러갈 순 없다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 그린대로 한발 한발 나아가고 싶었는데 그건 욕심이었다.
타고난 피부는 탄력을 잃었고 푸석해졌다. 폭삭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갑자기 ‘폭삭’ 늙어버렸다. 생기와 활력을 잃어가는 것도 속상한데 요즘은 단기 기억상실증처럼 자꾸 깜빡 놓친다. 샴푸로 샤워하거나 아이크림을 영양크림처럼 얼굴 전체에 바르는 건 귀엽기나 하지. 남의 카드를 잃어버릴 뻔했고, 약속 시간을 확인했지만, 요일을 착각했고, 현관문을 잘 닫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부지기수다.
이런 일상이 이 나이에 겪는 성장통인지 과부하인지. 정신 차리기 위해 강박적으로 기억하려 애쓰지만, 노력한다고 회복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얼마 전엔 몇 년 만에 대학원 동기와 약속이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대학원 친구를 업무가 아닌 사적으로 보는 건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이던가? 서로 삶이 달라졌고, 그저 살아내기에도 바쁘니 ‘SNS의 좋아요’ 정도의 친분만 유지하다가 무슨 바람이 불어 만나기로 했다. 웬일인지 그날따라 휴대폰 챙기는 걸 깜박 잊었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천호동’만 기억날 뿐, 어디에서 보기로 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돌아가면 다시 나오긴 어려울 것 같고, 이대로는 약속 장소를 찾을 수도 없다. 한참 동안 근처를 맴돌다 그나마 나이 들어 생긴 넉살로 근처 핸드폰 매장에 들어가 직원에게 인터넷 한 번만 이용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청해 포털 사이트 연관 검색을 통해 장소를 찾아냈다. 아까 지나쳤던 옆 건물이었다.
‘갑작스레 약속을 펑크 낼 사람은 아닌데, 언니도 이제 늙었다. 예전엔 이런 적 없었잖아.’
일찍 도착한 동기는 미안해하는 그녀를 다독였다.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을 웃어넘길 만큼 우리는 괜찮은 사이였을까. 어이없는 순간이지만, 웃어넘기면 그만이라는 여유와 연륜이 자라난 걸까.
세상과 맞서 싸워 이기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지만, 이런 실수를 할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순식간에 늙어버렸나. 젊디 젊던 지난날을 기억해주는 동기가 고맙고, 세월 앞에 장사 없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일시적 기억력의 둔화를 노화로 치부할 순 없겠지만, 요즘은 자꾸만 잊어버린다. ‘왕년에’ 같은 시절 하나쯤 없는 사람이 있을까. 지나간 추억은 언제나 미화되어 아름답게 보일 뿐이다. 지난날이 어땠는진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바라고 그리워한들 돌아갈 수가 있나. 지금 여기를 채우는 게 더 중요하지. 머리로는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최근에는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운동이라고 말하기 거창하지만, 몇 년 전 열심히 운동하던 시절만큼은 어렵겠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걷기를 시작했다.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오래전 운동할 때 즐겨 듣던 음악 파일엔 옛날 노래가 한가득이다. 요즘 새로 나온 곡은 가사는커녕 제목도 외우지 못하는데 내 음악 파일 속에 담겨있는 노래들은 전주만 나와도 저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어느 날은 출근할 때 어느 날은 퇴근할 때, 걷거나 뛰거나 산보하듯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리다 보면 집에 도착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걷는다. 20~30분이면 도착할 그 길을 1~2시간씩 천천히 걷거나 뛴다. 예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은 계획을 세워 운동하거나 리스트를 정하진 않는다는 것. 그날 컨디션에 따라 걷거나 뛴다. 운동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나 자신을 다독이는 시간이 된 셈이다.
길고 긴 인생에서 '효율적'이라는 말이 필요할까. 누구보다 시간 관리에 철저했던 그녀는 누구보다 느리고 느긋하게 걷고 있다. 지금 이 모습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안타깝거나 한심하진 않다. 움츠려 든 지금 이 상태를 깨우고 싶을 뿐이다.
잠깐 걷고 뛰었을 뿐인데 온 몸이 욱신거린다. 기분 좋은 근육통이 지난 시절의 모습을 기억나게 한다. 이 정도의 통증이 그리웠다. 다시 걷고 뛰며 마시는 공기의 냄새, 음악 소리, 고요히 흐르는 시간이 우리를 응원한다. 다시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