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세상 읽기

라떼는 말이야, Latte is horse.

용기 내 볼까.

by 아무

좋아하는 대학원 동기가 책을 냈다. 이번이 벌써 일곱 번짼가 여덟 번째던가. 함께 학교생활을 할 때엔 다들 비슷한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를 지나쳤을 뿐, 모두 상황과 사정이 달랐다. 대학원 동기라는 것 외엔 접점이 없었으니 졸업 후 얼마 못가 동문 모임도 줄어들었고, 그나마 몇몇과 간간히 주고받던 연락도 끊겨버렸다. 아니, 나를 제외하고 모두 비슷한 상황이라서 나만 튕겨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어울리던 2010년대 초반, 매일 일기를 쓰면서 ‘이렇게 쓰는 습관을 길들여 언젠가는 나의 기록이 담긴 책 한 권을 쓰고 싶다.’는 나의 sns 게시물에 ‘멋지다. 응원한다.’는 글을 남긴 동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쓴 책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의 추진력과 에너지가 대단하고 부러웠다. 승승장구하는 그녀에 비하면 나는 원하는 취업의 꿈을 이루지 못해 우울증을 겪으며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시기였으니까. 작고 초라한 내 모습에 짜증이 났다. 비교하기 싫었지만, 그들 앞에서 나는 작아졌다.


동기의 첫 책을 읽으면서 열등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책 속에 본인의 일상을 간간이 담았는데, 생애 첫 외제차를 구입하고 별 일 아닌 듯 명품을 구입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책장을 덮었다.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

명품가방 하나 없고, 여전히 뚜벅이로 생활하는 나와 그는 너무 달랐다. 용감하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 있는 모습에 비해 나는 너무나 평범하게 느껴졌다.

그 후 몇 번 더 신작을 출간을 알렸지만, 모른 척했다. 그런 상황을 또 마주하기 싫어서, 동기들 사이에서 멀리 떨어져 나왔다. 내게 대학원은 학위가 전부였다. 그 덕에 먹고 살 수 있는 종잇조각 하나, 자격증을 얻었으니 그만하면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건지도 모르겠다.

동기 중에 본인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이는 나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다들 여유 있고 우아해 보였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나도 너희와 같아.’ 같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지만, 역시 난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 사이에서 도망쳐 열심히 일했다. 오직 일만 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 동기는 잘 나가는 쎌럽이 되었고, 나는 이대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굳이 소식을 주고받지 않는,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다. 네가 잘났고, 내가 못나서 멀어졌다기보다는 서로 살아가는 상황과 사정이 다르니 당연한 결과다. 나 또한 열심히 일해서 이젠 미친 듯 일만 하지 않아도 살만해졌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접점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각자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만, 나의 자격지심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저 멀리로 밀어낸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다.




‘왕년에’ 같은 때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기억이 많은, 제일 잘 나가던 그 시절의 기억은 좋은 순간으로 미화되어 아름다운 느낌으로만 추억하게 된다. 감정의 높낮이 폭이 큰 사람이라면 더더욱.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나의 흰머리를 뽑아주던 사람이 있었다. 소심하고 여리고 자기애가 강해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흉보고 다녔지만, 문득 돌이켜보니 그와 함께할 때 가장 평범한 연애를 했던 것 같다. 친구들끼리 ex-남자 친구를 흉보며 수다를 나눌 때 언제나 1순위로 손꼽던 그 사람은 무언가를 함께 하고 싶다고 요구했고, 이런 것은 싫다고 이야기했다. 정확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 건 나였다. 사실 가장 최악이었던 건, 관계와 소통에 서툴렀던 나였다.

연애나 이성에, 결혼에 관심 없는 듯,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 두렵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거란 걸 알기에, 다시 욕심내고 싶지 않다. 시간이 흐른다고 경험치가 쌓인다고 없던 능력치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요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연애뿐 아니라 낯설고 새로운 사람과 환경이 무섭다.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것만, 성공할만한 도전만 즐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유재석과 이효리, 비가 함께 모여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MBC의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싹쓰리’라는 그룹을 만들어 ‘그 시절 신나는 여름 댄스 음악 앨범 만들기’를 하는 중이다. 듀스의 ‘여름 안에서’ 같은 명곡을 리메이크했고, ‘다시 여기 바닷가’ 같은 새로운 곡을 제작하기도 했다. 셋이 모여 아이디어를 나누고, 컨셉을 정하는 모습을 보면 한없이 빠져들게 된다. 그들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나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꽤 괜찮은 사회적 위치까지 올라가 본 적이 있다는 차이점도 있다. 한때 정상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서 아이디어도 행동도 명쾌하지만, 때로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 같다. 아무 이야기를 던지고 실없는 행동을 하다가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사람들. 느리고 고민 많은 나와 정말 다르다. 괜찮은 기획에 좋은 사람들이 만났다.


왕년에 정상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최약체여서 어디가 정상인지 알 수 없는 나는, 여전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들이 부럽다. '정상을 경험해본 적이 있음'이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같은지 나는 알지 못한다. 창피하고 부끄럽지만, 도전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이 아니라 도전해도 되는지, 그런 생각을 해도 되는지 자체를 스스로 판단할 수 없었다. 내가 수많은 고민을 속으로 쌓아가며 망설이는 동안 나의 동기는 새 책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렇게 쌓아 만든 기록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 한 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들였는지 경험해본 적 없는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이제는 내가 부족하다 해서, 내 열등감 때문에 나와 다른 너를 밀어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동기의 새 책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다.


나의 왕년은 지금이다. 남들보다 덜 가졌다고 투정 부릴 나이는 지났다. 그 정도는 인정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너와 내가 다름을 인정하고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



Photo by Fahmi Fakhrudi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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