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지인과 통화 중에 매사에 적당히 몸 사리는 지금 나에게서 뜻밖의 여유가 느껴졌다. 무미건조한 지금 이 시기가 지루하고 답답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는데, 쫓길 일도 없고 서두르지 않아도 상관없는 상대적 여유를 깨달았다.
급할 것 없는 요즘
감사하면서도 조바심이 든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괜찮은 건지
요즘은 더치커피에 빠져있다. 맛 좋은 더치를 발견한 후부터 간편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기다가 오랜만에 원두를 꺼내 새 원두 한 숟갈과 오래된 원두 반 숟갈을 섞었다. 새로 사 온 원두는 얼그레이 같은 부드러운 -다소 밋밋한- 풍미가, 예전 원두엔 묵직한 탄맛이 있어서 섞어도 좋을 것 같았고, 결과는 생각보다 괜찮다. 둘의 단점을 잘 보완하는 맛의 커피가 되었다.
매사에 감사보단 불평불만이 많은 나인데, 어제는 뾰족한 가시로 감정 소모를 키워 나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내는 내가 보였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불안해하고 조바심을 느끼고 있는 걸까. 끝없는 자기반성만이 나를 지키는 힘이 되는 걸까. 성찰의 시간 따위 없이 마음 편한 사람도 과연 있을까.
새 원두를 사 온 날도 그랬다. 쉬는 날 일부러 찾아가서 사온 건데 밋밋한 향에 짜증이 나서 한동안 구석에 밀쳐두고 관심 갖지 않다가 오늘 문득 꺼내어 묶은 원두와 섞은 게 신의 한 수였다.
오늘의 커피는 좋았다.
한 잔의 커피 덕분에 오늘 하루도 괜찮을 예정이다. 오늘 하루만은 날카로운 가시를 조금 숨기고, 나 자신과 타인을 향해 일부러 긁어내며 상처 내진 않을 것이다.
내일도 괜찮을까? 내일까지 욕심내는 건 무리일까?
커피 한 잔에 오늘 하루를 점쳐도 괜찮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