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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커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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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an 25. 2022

참새와 방앗간

커피 -에 대한 거창한 고백 같은- 일기

요즘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불면증이 생긴 후부터, 목에 칼칼한 이물감을 느낀 후부터, 마음 상태의 온전치 못함을 느낀 후부터, 커피가 나의 감정을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걸 깨닫게 된 후부터 의식적으로 커피를 피하고 있다. 커피 없이 나른한 오전을 깨울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나 보다. 무엇이든 마음먹기 나름이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잠들 수 없었고, 커피 없이도 멀쩡한 오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커피 생활 9년 차에 알게 되었다.


커피에 대한 집착은 수년 전 연인과 헤어지면서 시작되었다. 괴로운 마음을 채찍질하고 바짝 정신 차리기 위해 마시기 시작한 애증의 관계였지만, 2017년 교토 여행을 다녀오면서부터 원두 본연의 향과 맛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풍미를 즐기게 되었지만, 역류성 인후염, 저혈압 등 나의 생체 리듬은 커피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고질적인 집착은 커피를 더욱 끌어당겼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이제야 내 영역에 들어온 커피를 끊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단단히 믿고 살았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집착하면 어딘가 이상신호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인간관계가 그랬고, 면접도, 임용고시도. 흘러가듯 내려두어야 하는데 내 것이라고 욕심을 부렸더니 더욱 처절하게 내 곁을 떠나갔다. 가지려 할수록 더욱 멀어져만 가는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상실의 경험이 쌓일수록 자존감이 낮아졌고,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게 되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고 노력해봤자 결코 가질 수 없다는 경험이 축적될수록 무너지지 않기 위해 거리두기를 선택했다. 무언가 간절히 바라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 온전히 내 것이 어딨겠는가. 잠시 스쳐가는 인생사, 이만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면 그뿐인 것을.


커피도 그렇다. 매일 맛있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강박, 언제나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집착은 나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고 몸과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정신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커피를 챙길 정신이 없던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커피 없이도 잘 살 수 있었다. 아니, 의도적으로 커피를 피했다. 이만큼이라도 고통을 덜어내고 싶은 나의 의지이자 욕심이었던 걸까.






오랜만에 업체에 들러 업무를 마친 후,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당연한 듯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소금 라테가 맛있는 그곳. 큰삼촌뻘 되는 멋쟁이 아저씨 한분과 나, 단 둘이서 고요한 시간을 맞이했다. 꺼낸 책은 사진만 찍고 도로 넣을 만큼 순식간에 소금 라테가 사라졌고, 커피가 줄어드는 시간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코로나 겁쟁이인 나는 얼른 마스크를 채비하고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부드러운 크림과 소금 알갱이의 촉감은   어울린다. 커피에 짠맛을 더한 건지, 크림이  건지, 단지 소금 알갱이 덕분인 건지, 짜고 부드러움의 어색한 조화로움은 적당한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오는 한겨울날, 얼음의  기운을 더해 약간의 재채기를 덤으로 얻었다. 커피를 마시기 좋지 않은 몸상태였지만, 무엇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향했고, 단돈 5 원의 사치로 5 동안 찰나의 즐거움을 누렸다.






언젠가 다시 커피를 원하는 날이 오게 되겠지만, 당분간은 마시지 못할 것 같다. 커피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보다는 깊은 잠을 더욱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피에 대한 집착을 그만 내려놓으려 한다. 강박적 집착이 비단 커피뿐이던가. 하지만 이만큼이라도 내려놓고 홀가분해지고 싶다. 커피 한 잔을 준비하며 숨 고르기 하던 시간을 만들지 않아도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갔다.


내게 커피는 하루 시작을 다지기 위해 준비하고 즐기는 모든 시간을 의미했다. 매일 커피를 마시며 명상을 했고, 책을 읽고 쓰기를 이어갔지만, 커피 일기를 쓰던 이 공간에 이제는 커피 말고 다른 이야기를 채워야 할 것 같다. 더 이상 내 몸이 커피를 원하지 않는다. ‘절대’라는 것은 없으니, 절대 커피이야기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닐 테지만, 더 이상 커피가 즐겁지가 않다.


내 삶의 즐거움 중 커피 생활이 팔 할을 차지했으니, 아직 이 할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이 할 역시 온전히 내 몫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역시 언젠가 내 곁을 떠나갈 수도 있고, 더 이상 나를 즐겁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인생 자체에서 즐거움이 차지하는 비율이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당분간은 새로운 즐거움을 찾으려 노력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시간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내려놓을 것이다. 이십여 년 전 방황하던 청춘의 내가 그랬듯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다 보면 언젠가 어느 곳에 맞닿게 될 것이다. 만나지 못한다면 어쩔 수없고, 어딘가에 닿게 된다면 감사할 일이다. 단지 그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나를 떠날까 겁이 난다. 상실의 불안을 커피에 대입해서 액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으려는 욕심,  또한 집착일지도. 그저 집착에 그치지 않기 위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적당한 거리와 긴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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