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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꽃신내꽃신 Dec 29. 2021

가는 꽃, 오는 꽃

북풍한설 시골 마당 

 



   내가 사는 남쪽 지방에도 성탄절을 전후해 매서운 한파가 다녀갔다. 시베리아 기단이 몰고 온 맹추위를 후들후들하게 체감하며, 온대기후의 아열대기후 이행기를 잠시 잊은 때. 정원의 소나무에 매단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물이 바람에 차게 흔들려도 맘 자락은 꼬마전구들 반짝임같이 훈훈했다. 겨울이 따듯하면 지구의 가장자리인 양극 지방에서 고통을 겪는 동물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고, 온갖 이상기후에도 불구하고 안락함을 추구하는 생활사에 길들여졌으니, 무심코 내뱉는 "엇, 추버라!"라는 말도 조심스러워진다.




귀염둥이들의 흙목욕

  

   그런데 청계 일곱 마리가 첫겨울을 나고 있는 텃밭을 바라보는 맘은 편치 않았다. 닭이 추위를 잘 견딘다고는 하지만 "닭들은 추버서 어째?"라는 말은 툭하면 튀어나왔다. 남편과 아들이 닭장 지붕에 이중 천막을 치고 바람이 들만 한 곳엔 비닐을 둘렀다. 병아리일 때 켜준 발열 전구도 달았다. "이 정도면 호텔"이라는 남편의 말에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통에 담긴 물이 꽁꽁 언 호텔이라니! 이중창도 모자라 도시가스 연기까지 내뿜는 실내 생활인들이 저들의 공간을 짐작할 수나 있나. 



   하루에 네댓 개의 알을 선물하던 귀염둥이들이, 추워지자 알의 숫자를 줄였다. 수탉의 울음에도 언 기운이 든 듯했다. 텃밭에 산책 나올 때마다 뜯어먹던 상추는 관리 부실로 몽땅 얼어버렸다. 겨울초는 얼기 전에 관리하자며 부직포로 덮어뒀고 벌레들은 더 깊은 곳으로 숨었다. 그저 얻던 자연 부식이 사라지고 주인은 추위를 핑계로 인공 부식 조달이 뜸하니 얼마큼은 영양부족일 터다. 그래도 매일 두세 개의 최고로 신선한 단백질을 제공해 준다. 고맙고도 미안하다. 



   오늘은 한낮 기온이 좀 올라서 닭들을 텃밭에 한참 동안 풀어놓았다. 언 상추를 쪼아 먹고, 그간 쳐다보지도 않던 대파를 쪼고, 흙을 파헤쳐 뭔가를 골라 먹고, 부드러운 흙더미에서 흙목욕을 하고, 맛 없는 귤껍질을 뱉고, 푸득푸득 날아다니고... 며칠 동안 갇혀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냉동실에 넣어둔 대멸치를 한 사발 남짓 먹기 좋게 자르고 김장 때 남긴 배춧잎 몇 장을 뜯어 닭장으로 갔다. 잠시 알을 품다가 나간 어미닭 자리에 알이 네 개나 놓여 있다. 알을 집은 손에 온기가 느껴진다. "닭들아, 알 가져간대이. 미안허고 고맙대이!" 




정원의 소나무도 반짝반짝, 한 해를 보내고 맞는다.


   전자레인지 용기에 알을 삶아 맛나게 까먹고는, 닭들을 우리에 몰아넣은 후 마당을 몇 바퀴 돌았다. 신발에 밟히는 마른 잔디는 꼿꼿이 살았을 때보다 폭신폭신하다. 새로운 봄을 잘 키워내라고 폭신한 풀털로 뿌리를 덮어주는 것 같다. 초여름부터 시원스럽고 풍성한 꽃을 피워온 수국이 갈색으로 변해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가을 내내 노란 향기를 뿜어내던 국화도 마찬가지다. 죽은 꽃이라고 성격 급한 남편이 잘라버리려 하는 걸 말렸더니, 이 찬 계절에도 꽃을 보는 기쁨을 준다. 치자열매는 또 어떤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치자꽃 향기를 품고서 겨울을 오렌지빛으로 매달고 있다. 온화한 날씨 때문에 계절감각을 잊은 매화나무는 12월 초부터 꽃망울을 달았다. 한파에 얼어버릴까 봐 걱정스러웠는데 멀쩡히 크기를 키워간다. 자연의 섭리는 인간이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영역이 아니니. 





   인간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다 보니 지구는 더워지고 우주에는 온갖 오물이 떠다닌다. 그래도 변함없이 오늘의 해는 졌고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어둠에 든 닭들은 서로의 몸을 꽉 붙여서 깊이 잠들었겠다. pc 앞에 둔 올해의 마지막 모과를 썰어 소주에 담갔다. 깜깜해진 마당에 나가니 닭장의 천막을 흔들며 바람 한 줄기가 쌩 지나간다. 여기저기서 얻은 달력이 2021년을 내린 자리에 반짝반짝 걸리는 날이 세 밤을 자고 나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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