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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꽃신내꽃신 Mar 10. 2022

내게 온 닭

전원생활 청계살이

   


  

   병아리를 사려고 한 시간 넘게 차를 몰아 K시까지 간 날은 지난해 어린이날 하오. 남편의 강권에 못 이겨 따라간, 가장 가까운 곳이다. 한적한 마을로 접어든 후 산길을 제법 올랐다. 목줄도 묶지 않은 멍멍이 세 마리가 늘 하는 인사치레인 듯 컹컹 반겨준다. 저 아이들은 일평생 목욕이라는 걸 하게 될까. 식구와 공원을 산책하고, 현관에서 먼지 묻은 발을 닦고, 이쁜 모양의 간식을 먹고, 매일 양치를 하고, 적어도 보름에 한 번은 몸을 씻는 도시의 뽀얀 멍멍이들이 떠오른다. 먼지와 오물을 햇살 한 줌에 매단 털 뭉치가 만첩풀또기 분홍꽃에 내려앉는다.



청계들 집은 올림푸스 산. 제우스 장닭과 흰색 닭 레다, 회색 닭 이오와 다나에와 세멜레, 검은 닭 알크메네와 에우로페가 산다. 이곳이 그리스의 최고봉이면 어떤가. 닭들이 신화의 화신이면 어떤가. 닭의 일상도 사람의 일상도 신화에 다름 아니다. 코 앞에 서 있는 홍매화 향기로 봄을 맞는 텃밭 신화 속 주인공들.    



   산 중턱 어디쯤서 내려온 양계장 주인이 병아리장을 열어준다. 냄새가 지독해서 코를 꽉 틀어막지 않고는 서 있기가 힘들다. 수백 마리 병아리가 한 목소리로 삐약거린다. 병아리 합창대회 관람은 생전 처음이라 우와, 마스크가 벗겨질 듯 입이 벌어진다. 주인장이 멋쩍게 웃는다. 그러고는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병아리를 잠자리채 같은 것으로 솜씨 좋게 잡아챈다. 종이박스에 열 마리를 담아 차 뒷좌석에 실었다. 병아리장 냄새도 아쉬운 듯 따라붙었다.


   남편이 사흘 걸려 완성한 조립식 닭장은 두 평 남짓. 텃밭 앞쪽 자리를 차지했다. 들쥐나 뱀, 족제비의 공격에 대비해 야간에는 항시 불을 켜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철벽으로 방어해둔 닭장 밑을 뚫은 들쥐에게 한 마리가 당했다. 텃밭 가장자리에 묻었다. 아홉 마리는 잘 자라났다. 잘 자라났으나 문제는 수탉이 세 마리였던 것. 서열 쟁탈전에 수탉끼리의 싸움이 어찌 빠질쏘냐. 남편은, 닭을 잡아줄 사람이 있다며 푹 고아서 나눠먹자 한다.  



닭은 먹을 수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채소류는 텃밭에서 나는 달달한 유기농 간식이다.   


   요리된 치킨을 사 먹거나 파는 생닭으로 백숙을 해 먹는 일은 일반화된 식성이 됐다. 하지만 병아리 때부터 매일 보고 지낸 녀석들을 과연 먹을 수 있을까. 나의 반발을 못 이긴 남편은 수탉 두 마리를 지인의 닭장으로 보냈다. 암탉뿐이어서 수탉을 사려던 차였단다. 두어 번 인사를 나눈 적 있는 그가 닭의 다리를 묶어 데려갈 때는 내다볼 수가 없었다. 눈물을 찔끔거렸다. 상상만으로도 귀찮을 것 같아 닭 키우는 일에 반대한 터였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한집 식구가 되니 매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날이 샜다고 어서 일어나라고 질러대는 수탉 고함을 듣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냄새나는 응가를 코를 막고 쓸어내는 일이 자꾸만 생겨났다. 물통이 더러워지면 병이라도 들까 봐 수시로 헹궈서 새 물을 넣어주었다. 텃밭에 풀어놓으면 흙을 파헤쳐 벌레를 쪼아 먹는 모습이 신통방통했다. 나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채소밭을 장악할 때 훠어이~ 쫓으면, 입에 푸른 즙을 묻히고서 날거나 달리는 모습은 매번 웃음을 자아냈다. 입맛에 맞는 음식을 주면 '오잉? 이게 뭐양? 왜 이렇게 맛있닭?' 하는 표정으로 꼬꼬꼬 소리를 높였다. 나도 어지간히 정이 들었던 것이다. 어린 청계의 맛을 기대하던 친척이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섭섭한 한편으로 흐뭇했다. 그러던 연말의 어느 날,


   두 마리 수탉이 술안주가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인의 기름진 얼굴이 떠오르면서 머리털이 뻣뻣해졌다. 잡아먹지 않는다는 언약을 하고 데려가지 않았는가.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따지러 갈 태세로 대문을 박차고 나섰다. 어쩌랴, 이미 그들의 피와 살이 돼버린 걸. 내가 어리석었던 건가. 수탉들의 운명이라 여기며 명복을 빌고 돌아섰다.  


   가을 한 달 동안, 참으로 곤란한 일이 일어났다. 세멜레와 알크메네가 한 곳에 들어가 알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무려 23일간을 먹지도 않고 꼼짝없이 자리를 지키는 어미닭의 눈빛을 형언할 길이 없다. 잠은 자는 건지. 깜깜해지면 닭장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그들의 평소 행동으로 짐작컨대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눈을 부라리지 않았을까. 귀여운 병아리를 기대하는 날들이었지만 알을 품는 자리도 문제였다. 암탉은 한 자리에만 알을 낳는 습성이 있다. 나머지 암탉들이 알 품는 자리에 들어가 계속 알을 낳았다. 주변이 알로 넘쳐났다. 두 닭은 그 좁은 곳에서 날개를 자꾸만 넓혔다. 품을 벗어난 알은 시간이 흐르면 상할 수밖에 없으므로 꺼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데,



병아리 열 마리 중 한 마리는 이보다 어릴 때 들쥐가 데려갔다. 수탉 두 마리는 입양 간 뒤 그 집 사람의 피와 살이 되었다.


   뜨거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달걀을 깨뜨린 순간 으아아악! 나는 그만 기절 직전까지 가고야 말았다. 그것이 검붉게 쏟아졌다. 곧 알을 깨고 나올, 줄탁동시의 상황에 놓여야 할 병아리가 들어있던 것이다. 후덜대는 다리로 소리를 지르며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일요일의 아점을 기다리던 식구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나를 따라서 뛰쳐나오고. 부엌에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단다. 뒤처리는 그나마 비위가 좋은 남편 몫이 됐지만 나는 며칠을 앓았다. 비장이 약한 체질이라 몇 끼를 굶었다. 음식만 보면 토할 것 같았다. 사나흘 간 두 닭에게 쪼임을 당하며 가져온 냉장고의 달걀들이 땅에 묻혔다. 남편의 비위는 인정해줘야 한다. 굳이 다 깨뜨려본 모양이다. 열 개 중 세 개가 그러한 모습으로 나왔다니.


   잊을 수 없는 10월 19일 아침.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가을날. 행여나 병아리가 나왔으려나, 어쩐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 조잘거림은 뭐지? 처음 듣는 새소리였다. 우왕왕~ 병아리 세 마리가 삐약삐약삐약삐약 삐약삐약삐약삐약... 어미 곁을 돌아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물맑은 산중에서 내려온 어린 신선의 노랫소리가 이러할까. 병아리의 첫 소리에 나도 모르게 환호를 질렀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여덟 마리가 줄탁동시의 고통과 환희를 경험했다. 두 마리는 안타깝게도 하루살이의 삶을 살고 떠났다. 닭이 알품기를 그만둔 때까지 서른 개의 알이 들어 있었다. 결국 태어나지 못한 생명들도 텃밭에 묻혔다.                       

      


텃밭으로 온 열 마리 중 일곱 마리가 무럭무럭 자랐다. 알을 낳고, 병아리를 품고, 또 알을 낳으며 봄맞이 중이다. 오월이 오면 한집 식구가 된 지 일 년째.   


   품을 드나들긴 하지만 어미닭이 젖을 먹이는 것도 아니고, 어린것들을 닭장에 위태롭게 둘 수도 없는 일. 닷새 후, 말 못 하는 어미의 가슴에서 어린것들을 떼어냈다. 커다란 박스로 집을 만들고 병아리용 모이통과 물통을 구입했다. 어린 병아리는 스스로 체온조절을 못하므로 30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해줘야 한다. 한낮엔 따듯한 햇볕 아래에 두고 밤엔 창고로 옮겨 전기장판을 켜주었다. 돌아다니는 고양이들 때문에 수시로 병아리장을 둘러보았다. 그 쪼그만 부리로 먹이와 물을 쪼아 먹고, 몸을 포개서 잠들고, 삐약삐약 노래하는 앙증스러움이라니. 그러나 며칠 후 그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병아리와 집이 통째로 몇만 원에 팔려나갔다. 앞집에 가끔씩 드나드는 사람이 굳이 데려가려 했다. 양계장 사업할 게 아니니 닭장 두 채를 지을 수도 없는 일. 병아리 욕심은 과감히 버려야 했다. 어른 닭이 된 사진을 얼마 전에 받아보았다. 두 마리는 족제비가 물어갔단다. 그 또한 그들의 운명이려니.      



태어난 이후부터 묶여 지내는 뒷집 삽살개에게 놀러 온 반려견. 둘이 한참을 사이좋게 놀았다.


   텃밭에서 날개를 털던 닭들이 갑자기 각자의 소리를 지르며 닭장으로 달려간다. 미처 못 들어간 이오가 나무 뒤에 숨어 꼼짝도 않고 공중을 노려본다. 눈빛을 따라가니 매 한 마리가 난다. 세상에나, 무서버라! 개구리도 벌레도 초목도 긴 겨울을 이기고 기지개를 켜는 즈음이다. 이제 텃밭도 씨앗 트는 소리에 흠뻑 빠져들어야 하는 때. 안타깝게도 닭들은 닭장에 종일 갇히는 신세가 됐다. 흙을 파헤치는 습성은 봄날의 텃밭에 해롭다. 미안하다, 닭들아. 우리의 푸른 양식(푸성귀)이 자라날 때까지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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