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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꽃신내꽃신 Jan 28. 2022

못잊어 100원

전원생활 뜰 독서

   




   값 100원. 지난 성탄절에 받은 선물의 가격이다. 호호할배의 기다란 양말도 호호할매의 리본 상자도 없었다. 조심조심 양손으로 받아 들었다. 꽃촛불 켜든 성탄카드를 우체통에서 꺼낸 기분이었. 소월 시집 <못잊어>. 노랑이었을 표지 양면은 누렇게 바랬고, 책등은 황토색을 건너 흙토색이다. 1959년 초판부터 1965년 19판까지의 상세 발행일자가 마지막 속지에 선명하다. 끝이 풀린 오렌지색 가름끈은 손때와 먼지의 세월로 거무스름해졌다. 읽다가 깜빡 잠들었을 때 머리맡의 자리끼가 저지리를 한 걸까. 뒤표지에 일렁인 물기가 파도무늬를 그려두었다.   



책과 커피가 있으면 뜰에서도 한나절



   1965년. 나는 어느 행성을 떠나 엄마 뱃속으로 질주 중이었을까. 내 생명 이전에 100원 시집을 열독한 이는 누구였을까. 1965년의 세종대왕 100원권 새 지폐로 서점에 들렀을까. 그 당시의 100원이면 대중탕에서 때를 밀고,  짜장면 한 그릇 비우고, 미스 김 다방에서 커피 한 잔까지 즐길 수 있었다는데. 그러고도 남은 5원으로 애들 과자 한 봉지는 샀을 텐데. 배 부른 하루보다 살진 영혼을 누린 날이었겠다. 그이는 외풍 시린 겨울밤, 무거운 목화솜이불을 둘러썼겠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등잔불이 한들거렸을 것이다. 시인의 꽃촛불 같은 음성이 그림자를 좇으며 달큰히 번졌으리라.   



   오랜만에 해가 쨍하다. 바람도 잔잔. 야외 독서에 안성맞춤인 하오다. 뜨거운 커피잔과 시집을 들고 테라스 벤치에 앉았다. 집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으니 바람도 태양도 민낯 그대로 달려드는 곳. 그래서 겨울 체감기온은 약간 낮고 여름은 좀 더 높다. 통유리로 내다보는 들 어떠랴. 아니지. 전원생활의 묘미는 직접 찍어먹는 맛. 그 당시의 제본법대로 소월 시집도 세로 쓰기의 오른쪽 매기(우철 제본)이다. 왼쪽 매기(좌철 제본)에 익숙하여 낯설다. 표지모델의 이국 소녀는 이제 저만한 손주를 두었겠다. 흰 저고리, 단정한 머릿결의 젊은 시인을 마주 본다. 1902년생인 소월 시인은 서른세 해의 짧은 생애를 154편의 시와 <시혼> 시론에 담았다. 망국의 설움과 그리움이 그의 표정과 페이지마다에서 실낱같이 일어난다. 진달래꽃 한가득 그려진 속지를 느릿느릿 넘긴다. 바싹 마른 클로버잎을 보니 웃음이 난다. 우와~ 나와 같은 취미를 가진 이였구나! 동시대의 고통을 걸머지고 불꽃같이 피다 간 여러 시인도 어른거린다. 그들도 클로버잎을 따며 미소 지은 순간이 있었으리니.

 


내게 온 고귀한 손길, 100원 소월 시집 



   내 서재에도 오른쪽 매기의 세로 쓰기 책들이 꽂혀있다. 49년 전에 아버지가 구매한 12권짜리 세계문학전집. 어려운 시절에 지인의 강권으로 사셨다. 우리 집 6남매도 읽고 마을의 처자 총각들도 빌려가서 읽었다. 떨어진 표지를 묶은 누런 테이프는 이제 끈적함을 지나 바삭거린다. 어떤 책 표지에는 지워지지 않은 동지팥죽 흔적도 있다. 아무 데나 밀쳐두었으니 냄비받침용으로도 소용됐으리라. 천상의 꽃밭에 계시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 한 번씩 펼쳐본다. 잘못 만지면 속지가 부서질 때도 있다. 가끔씩 발견되는 책벌레는 낡은 글자인 양 정답다. 잦았던 이사 때문인지 돌려받지 못해서인지 두 권이 비었다. 그들의 안부가 자주 궁금하다.



   햇살 아래서 책을 읽는 일. 내게는 반짝거리나 책에게는 나쁘다. 책은 공기, 습도, 자외선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독서도 숨 쉬며 해야 하니 공기는 어쩔 도리가 없다. 습하면 곰팡이가 생기고 종이가 운다. 화장실에 둔 책 대부분이 그런 운명을 껴안은 채 서재로 돌아간다. 자외선은 종이에 포함된 리그닌과의 광화학 반응으로 종이를 누렇게 변색시킨다. 형광등에서도 나오므로 독서등에 자외선 필터를 달기도 한다. 이상적인 서가의 조건은 30~50%의 습도, 18~21도 사이의 온도. 창문이 없고 공기필터가 있는 방이 좋다. 가정에서는 직사광선이 안 닿는 그림자 진 곳이나 어두운 방을 택한다. 서가에서 빨래를 말리는 건 금물.




49년 전에 아버지가 구입한 세계문학전집. 관리 부실로 책벌레가 산다.



    한 사람의 오랜 책꽂이를 떠나 내게로 온 시의 길을 가늠해 본다. 가로 12cm, 세로 16.5cm의 이 작고 귀한 책을 건네준 손길도 헤아려 본다. 소월 같은, 시대의 명시를 쓰라는 당근과 채찍이리니. 시인이라는 명찰을 어느 날 운 좋게 달았으나 갈 길은 언제나 멀다. 가지산 정상에는 언제 눈이 내렸던 걸까. 와불 모습의 어진 봉우리가 눈이불을 포근히 덮고 있다.



가지산 정상의 와불께서 새해의 눈이불을 따시게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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