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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꽃신내꽃신 May 02. 2022

전원생활 놀람 주의!

봄의 범람이 송홧가루뿐이랴?

  



   동네방네 소나무꽃 풍문이 자자하다. 겨우내 숨겨둔 예쁨을 맘껏 내뿜는 봄꽃 천지. 소나무꽃만큼 막강한 이빨을 드러낼 이, 거기 누구 없소?



   누구나가 흡! 입을 가린 사방팔방으로 신나씬놔~, 햇가지를 부풀리는 꽃술들. 나는 '봄의 범람' 명찰을 소나무마다 달아주었다. 집 지을 때 정원수로 심은 소나무가 19그루, 그저 얻은 눈앞 풍경인 당산터의 뚱보 소나무, 그 곁의 서낭당을 둘러싼 솔숲, 그 너머와 이웃과 그 이웃의 솔과 솔, 그 너머 너머엔 이 동네 저 동네 요 동네 조 동네 고 동네 갸 동네 온 동네를 360도 둘러싼 영남알프스 산줄기의 헤아릴 수 없는 솔 솔 솔. 시야가 미치는 곳이든 아니든, 세어보지 않아도 우리나라에선 단연 그들이 으뜸이다. 그래서 영어 이름도 Korean red pine(적송, 솔나무, 송목, 육송 …).


천지사방이 소나무꽃으로 덮이고 덮이고 덮이고. 저 조그만 수꽃들의 속내가 다 털리면 봄날도 간다.     



   소나무꽃은 바람을 이용해 꽃가루받이를 하는 풍매화. 흔히 보는 색색의 꽃들과 달리 꽃잎이 없어 곤충이 들지 않는다. 봄마다 유명세를 떨치는 송홧가루의 주범은 수꽃으로 길이 1cm에 폭 3mm 정도. 손끝만 닿아도 후루룩 내리닫는 누런 가루는 가히 위협적이다. 가지 꼭대기에 암꽃이, 그 밑에 수꽃이 위치한다. 암꽃이 늦게 피므로 수꽃은 다른 나무의 암꽃에 날아가 솔방울 씨앗을 키운다. 우리나라가 오랜 세월 동안 소나무 문화권인 까닭이 이러한 근친교배 방지법 때문이었을 터. 그럼에도 어쩌랴. 범람살이가 명찰을 흔들며 나날이 넘쳐난다. 도대체 말릴 방법은 뭔가. 범람을 뒤집어쓴 속수무책의 마당이 재채기를 멈추지 못할 때면, 호스를 끌어내 샤워시켜주는 방법 하나. 닷새 전 밤 동안의 호우나 그끄저께 아침의 빗소리에 무작정 고마워하는 방법 하나. 물 없는 삶이 존재하겠는가만.

   마당 한쪽에서 자연의 이런저런 은혜로움 -햇살, 바람, 새똥, 꽃향기, 낙화와 낙엽, 갖가지 비와의 조우, 간혹의 눈발, 기타 등등-에 365일 방치되는 승용차 형상은 또 어떤가. 창도 문도 꽉꽉 닫아두는데 어쩜 그리 낱낱이도 침범하는지. 외연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외출 때마다 절로 감탄사가 폭발한다. 수시로 여닫는 창과 현관문을 매단 집안이야 뭐. 봄이 소나무꽃만으로 흥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이 화려한 꽃날에 내 눈을 범람하는 그 무엇. 아지랑이도 아니고 이르게 핀 과꽃의 겹겹분홍도 아닌 바로 그,



   스네이크. 한국말도 절망스러워 스네이크. 점 하나를 찍으면 님은 남이 되고, 점 둘을 찍으면 스네이크는 스테이크로 변모하건마는 이름자의 오류가 제법 심각하다. 점찍기는 참는 걸로. 정오의 담장 아래서 길고양이가 졸고, 개구리들이 툭하면 합창경연에 들고, 굳은 땅덩이는 한나절의 경운기 마찰로 포슬포슬해졌다. 마당으로 나가는 내 눈망울은 이맘때 무한정, 두리번 세리번 네리번…거린다. 혹시, 혹여, 만약, 행여, 어쩌면, 우연히, 만일에, 짐작대로? 같은 부사어들이 긴 꼬리를 달고서 눈길을 뒤따른다. 둘째 아들은 신기하게도 '우연히'와 잘 마주치는 모양이다. 사월 중순 그날, 대문간으로 택배를 찾으러 나가다가 헉, 마주친 기다란 물체. 그건 바로바로, 스네이크! 마당을 급히 뛰어다니는 발자국 소리. 뭐지? 내다보니 둘째가 부엌문 옆에 세워둔 연습용 골프채를 들고 대문간으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서, 서, 서얼마? 2, 3미터 거리에 있는 대빗자루의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테라스를 오간 사이, 놈은 재빠르게 담과 대문 틈새로 스며들고 말았다. 앞뒤옆 어느 곳을 살펴봐도 구멍은 오직 하나. 놈이 막, 동면 이후의 첫나들이에 나선 모양이었다.  


소나무꽃 때문에 문을 잘 닫아두는데 어느 틈에 들어온 걸까. 새끼 제비의 똥그란 눈을 가까이서 보긴 처음. 목과 가슴털이 실크같이 보들보들. 넘나 연약해서 에미에게로 쓔웅~> 어여삐 날려 보냈다.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꼬챙이를 넣어보기도, 쾅쾅 두드려 겁을 주기도, 토치에 불을 붙여 입구를 달궈보기도 했다. 그리고 조요~옹. 놈이 뛰쳐나오길 두어 시간 기다렸다. 한순간 대가리를 빼꼼거리긴 했으나 몸을 내밀진 않았다. 쪼그림 자세에 지친 둘째는 휴대폰의 페이스톡을 연결해 한 대는 구멍 근처에 한 대는 테이블에 두고서 망을 보았다. 서서히 어둠이 오고 배는 고프고. 입구를 두꺼운 종이로 막아두었다. 다음날 아침엔 세탁소용 옷걸이를 기다랗게 펴서 꽃아 두곤 움직임을 관망했다. 오후부턴 포기. 그곳에만 눈길을 주고 지낼 순 없는 일이니. 집을 떠나 먼 데로 가면 다행이고, 아니면 내 심장이 내려앉는 수밖에는. 둘째는 말했다. 놈이 누룩스네이크이니까 혹시 만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옴마 보면은 갸가 먼저 놀래 갖고 도망가뿔 낍니더.



   지지난해엔 텃밭에서 두 번, 지난해엔 텃밭에서 두 번, 마당에서 세 번을 놈들과 마주쳤다. 가슴이 최고로 벌렁거린 때는 창고 앞 수돗가(마당엔 편의를 위해 수도를 담장 코너 세 곳에 설치)에서 야채를 씻고 돌아서다가, 몸을 말고 앉은 1미터 앞의 놈을 본 순간. 나의 소프라노 음역대에 나자빠진 건 나뿐만 아니라 놈도 마찬가지였다. 별안간 몸을 풀어헤치더니 담장 틈으로 휙. 담장 너머는 갖은 풀들이 주인 노릇을 하는 푸른 세상(그곳을 상상하는 마음은 풀이 모두 회색빛으로 스러져 눕는 날까지 졸아들었다). 주저앉은 엉덩이는 잠자리에 누워서야 아파왔고, 벌렁거림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안타까운 건 나의 스네이크담을 가족들이 쉽사리 믿지 않은 일. 스테이크였다면 곧바로 먹으러 가자고 했겠지. 그렇다면 증거를 남기는 게 최선. 다시 눈에 띄기만 해 봐랏!



   햇살 좋은 오후였다. 텃밭의 닭장 곁을 지나 물 마른 개울로 내려가고 있는, 꽃스네이크? 달걀을 꺼내러 갔다가 뜨아악!  놈을 몇 번 봤다 하여 나의 음역대가 낮아질 리는 없다. 당산터 소나무가 들썩일 만큼의 노랫가락을 펼친 후 방안에 뛰어들었다. 한참을 헐떡이는데 닭들의 울음이 들려왔다. 어머어, 닭은 어찌 되는 고야? 어쩔 수 없이 한발 한발 내디뎌 낮은 담 너머의 닭장 주변을 훑어보았다. 한데 놈이 옆집의 빈 마당에서, 졸음 겨운 고양이처럼 햇살을 즐기고 있지 않은가. 담 위에 올라앉아 벌벌벌, 울가족 단톡방에 찰칵을 남겨주었다. 6, 7미터 건너편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혀를 날름대는 놈을 내려다보는 일이라니, 으으으…. 이후로 남편은 스네이크를 두 번 생포했다 했다. 상황과 결론은 묻지도 못했다. 알레르기 때문에 엄두를 못 낸 고양이나 강아지와의 동거를 심각히 고려하게 되었다. 동물 애호가 가족인 작은오빠네에서 고양이 형제를 데려오기로 했다. 뜻대로 되는 일은 무엇인가. 때맞춰 역병이 급속히 기세등등. 작은오빠 회사에선 타 지역 출입금지 엄명. 성묘길에 우리 집을 경유하려던 상봉의 기약은 까마득해지고.     

                   

겨울잠을 깨면 어김없이 마당과 텃밭을 찾아든다.꽃날이 즐거운 건 우리나 놈이나 다를 바 없으니.

   며칠 전, 둘째의 '우연히'가 다시 발동했다.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대문을 연 순간, 놈이 코앞에서 구물구물. 이번엔 대빗자루를 제대로 들었나 보다. 양치를 하는데 또 마당을 뛰는 소리. 열린 욕실 창으로 내다보니 으악, 연두색 대빗자루에 말려든 놈!

   -옴마요, 옴마아~ 지난번 그 양파망, 양파마앙~~

   -으아, 그거는 그거느은,,, 분리수거망 뒤에 있어어~~~     

   둘째가 놈을 양파망에 몰아넣느라 집게와의 실랑이를 벌였다. 내 아들 맞아? 어쩜 저리 겁이 없는 거야?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둘째 걱정에 보지 않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상황. 안경을 벗고 흐릿한 실루엣을 훔쳐보았다. 두어 번 달아나는가 싶더니 결국 놈은 제 몸길이만 한 양파망에 갇혔다. 둘째는 놈을 차에 싣고 제법 멀리로 갔다. 10여 km 떨어진 야산에 놔주었다 했다. 꼬리를 감추며 숲으로 드는 광경이 울가족 단톡방에 동영상으로 올랐지만 결단코, 보지 못하였다. 상상의 손만 흔들었다.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의 야윈 꼬리가 겹쳐졌다. 해변에 도착한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227일 간 태평양을 함께 표류한 자신의 주인 '파이 마텔'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 영화로 볼 때는 그 시크한 뒤태에 눈물이 나기도 했는데.



   스네이크는 두려운 존재이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뇌지도엔 어떤 그림이 들었을까. 이유를 막론하고 심장과 비장은 튼튼할 것 같다. 그래도 열에 아홉에겐 혐오와 공포의 대상일 듯. 특징적인 움직임, 날름대는 갈라진 혀, 독과 죽음. 독스네이크에 물린 경우야 말할 필요가 없지만 무독스네이크에게 물려도 좋을 리는 없다. 입안에 세균이 득실거리니까.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이고, 천적도 다양하나 갸들의 입장에선 가장 무서운 게 사람일지도. 땅에서 올려다보기 마련인 놈들의 눈에는 우리가, 소인국에 내려선 걸리버 같지 않을까. 더군다나 인간이 가진 다양한 무기는 한방에 갸들을 천국으로 휙! 푸른 기운이 펼쳐지는 동안의 시골마당에선 피할 수 없는 놈. 익숙해지는 게 상책이라고 식구들은 나를 몰아넣는다. 익숙해지라니, 적응하라니, 대체 어찌해야 가능한 일인가. 남편과 아들이 자연의 일부로 내버려 두지 않고 기어코 생포한 까닭은 나 때문이다. 나의 두려움이 아니라면 다들 헉, 내뱉고는 저 알아서 도망가도록 놔둘 것이다. 마치 마당에 들어온 길고양이가 사람의 눈초리에 달아나듯이.



   딱히 도리가 없다. 누군가는 맛나게 먹는 소의 생간, 선짓국, 곱창, 개불, 해삼, 기타 여러 가지 음식들 같다. 왜 못 먹느냐고 누군가들은 묻는다. 그냥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지난 늦가을엔 생쥐 한 마리가 천장에서 일주일을 버틴 적이 있었다. 쥐의 길이 콘크리트 벽에 있었다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누울 때마다 뭔가를 갉는 소리와 움직임 때문에 불면증에 몹시 시달렸다. 찍찍이에 멸치와 땅콩을 묻혀 에어컨 환풍구 주변에 몇 장 얹어뒀지만 소용없었다. 한 주 후 생쥐가 부엌으로 내달리는 걸 한눈에 발견한 것도 둘째였다. 고구마 박스에 들어간 걸 세 남자 식구가 합세해 잡아냈다. 욕실을 기어 다니는 돈벌레는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보는 즉시 눈을 감게 만든다. 습한 곳을 찾아든 거라서, 문을 활짝 열어두고 어서 나가라 나가라 소원하는 게 고작이다. 이사한 해에 담장을 기는 벌건 지네(10cm나 되는)를 봤을 때의 헉! 은 또 어떠했는가. 나의 증상을 그저 비장이 약한 체질 탓으로 돌린다.

     

마당과 텃밭의 과실나무가 열매의 시간으로 들었다.

   담장 곁에서 온 사월을 거머쥐었던 라일락 보랏빛이 작디작은 꽃 두 송이에 매달려 있다. 원두막 곁 앵두와 산수유, 대문 옆 모과, 화단가 장수매, 장미나무 옆 꽃사과, 텃밭의 청매실, 보리수, 오디, 복숭아, 자두, 살구, 배, 체리, 아로니아 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매의 나날에 돌입했다. 봄나무가 꼭지로, 꼭지가 꽃으로, 꽃이 열매로 부푸는 흐름은 볼수록 신비롭고 신이하다. 가까운 남매도 먼 지구촌 사람도 각각의 모습을 지녔듯 한 나무의 열매도 제각각이다. 자신의 방을 하나씩 열어 자기만의 세계를 키워가는 열매. 자신만의 색으로 생명체의 입맛을 물들인 후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는 열매. 5월의 연두연두가 초록초록으로 속속들이 번져 난다. 그리고 거기 어딘가를 자유로이 여행하며 봄을 범람하는 독. 그들이 한 해를 살아내는 동안 내 작은 방은 얼마만큼의 익숙과 적응의 너비로 자라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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