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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꽃신내꽃신 Jun 28. 2022

머, 장마라고예?

뒷집 강생이와 옆집 살찐이는 팅팅, 우리 집 전기는 퉁퉁

  



   바람이 거세다. 정자에 나뒹구는 모기향, 휴지, 선풍기, 빗자루, 수건을 안전지대로 옮겼다. 푸른 나무로 변모한 상추, 밤새 쑥쑥 큰 오이, 몸피 투쟁 중인 오종종한 대파, 영역 욕심쟁이 호박잎과 호박 두 통, 마트 야채 코너가 아닌 고랑에 떡하니 눌러앉은 양배추(양배추도 텃밭에서 자라는 거였다니!) 한 통, 변색해 가는 머위잎도 거뒀다. 오늘의  텃밭 만찬은, 입맛을 잃고 허리 통증까지 심해진 엄마를 위한 것. 엄마는 한여름에 막내딸을 낳은 후 지병처럼 증상을 이어왔다. 이맘때마다 짠하다. 그 흔한 선풍기도 비싸서 살 수 없던 시절, 한여름 무더위에 나를 낳는 엄마를 상상하는 일이라니. 여섯 자식 집으론 온갖 반찬을 만들어 보내지만 정작 당신의 평생은 흰쌀밥과 김장김치, 맵쪼름한 된장국에나 엄지 척이다. 막내딸네의 푸른 기운들은 맛난 반찬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래도 엄마의 내일 저녁상 한 끼는 흰쌀밥과 유기농 찬으로 얌냠냠이길.


심술쟁이 바람이 데려가 잔디마당에 심어놓은 낱낱의 장미꽃잎들



   찔레장미와 분홍장미가 한자리에서 예쁨 내기 중이다. 강풍에 흩어지는 꽃잎이 아쉬워 한 바구니 땄다. 하루만 햇살 아래 두면 꼬들꼬들하다. 이쁜 대바구니에 담아두고 오며 가며 향을 맡는 일도 전원살이의 한 재미. 수돗가에서 깻잎 몇 장을 씻고 있는데 어멋, 심술쟁이가 바구니를 들고 튀었다. 순식간에 잔디마당 여기저기에 꽃잎을 심어놓는다. 푸른 마당을 한순간에 꽃밭으로 변신시킨 요술 심술쟁이 바람. 허탈과 미묘의 기분도 동시에 피었다. 마당의 스산한 낙엽잔치만 보던 눈이 푸른 밭 꽃잔치에 황홀하다.


   후드드 창을 두드리는 소리. 미리 비를 피해 잠입한 올빼미와 노닐다가 헉, 고개를 드니 02시 32분. 드디어 거구의 장맛비님 도착이다. 창밖의 껌껌 발자국에 귀를 부풀리며 누웠다. 올빼미를 데려가고 꿈길로 나를 인도하는 손을 잡았나 하는데, "으이그!" 폭발하는 한숨에 놀라 눈을 떴다. 벽시계 바늘 두 개가 5를 지나며 하나가 돼 있다. "냉장고가 나갔어! 어, 테레비도 안 되네? 정수기 물도 안 나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남편의 호들갑스러운 발걸음. 눈썹 아래는 뜬 듯 만 듯인데 뇌의 한쪽이 번쩍 눈을 뜬다. 냉장고라고?


멧비둘기도 싫은 건 딱 싫다고!

 


   창을 여니 바람비가 방충망을 사정없이 뚫는다. 주섬주섬, 갖은 생각을 머릿속이 주워 담는다. 군인 때의 전기감전 몇 초간을 떠올릴 둘째도 어슬렁거리고. 부자가 1, 2층을 오르내리며 누전될 만한 곳을 찾는다. 혹시나 하며 손대 보는 차단기는 즉각 제자리 신호음을 탁, 탁, 거칠게 내뱉고. 천장의 전깃불은 아침을 더 훤히 밝히는데, 벽에 붙은 콘센트들은 깊디깊은 꿈길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냉장고, 정수기, 커피머신, 전기밥솥, 전자레인지, TV, 안방 화장실의 변기, 자동 대문….  일상의 중심을 주름잡던 것들. 아무리 두드려도 깨어나지 않는 몽중이다. 사람의 아침은 멍중. 어쨌거나 냉장고가 문제다. 결혼 이후부터 지금껏 줄기차게 부쳐져 온 엄마의 택배 음식들로 느긋함을 누릴 틈이 없는 냉장고. 저 두 대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남편은 속수무책이다. 음식을 다 꺼낸 후 냉장고를 들어내자고 한다. 그런데 둘째가 혼자서 냉장고를 좌우로 움직여가며 어기영차 끄집어낸다. 뒤쪽 벽에 곤히 잠든 콘센트가 드러난다. 4년 여의 먼지 세상 바닥도 실체를 드러내고. 잠시 벌어진 50대와 20대의 머리 대결이 싱겁기만 하다. 아버지는 창고에 있던 공사용 콘센트를 대령하고, 아들은 전기가 통하는 콘센트를 찾아 냉장고를 가동한다. 위이잉~ 냉장고의 소음이 이토록이나 정겨웠구나.


   차단기 라인이 몇 갈래로 나뉘어서 망정이다. 콘센트가 살아있는 옷방으로 캡슐커피머신을 옮겼다. 외출용으로 사둔 330ml 생수 한 병을 물통에 붓는다. 턱을 괴고 쪼그려 앉은 머릿속이 문득 '전쟁'이라는 단어에 쭈르르 말려든다. 내 가까운 것들이 깜깜해지는 일. 일상의 온갖 것이 떠나는 일. 생각 없이 누려온 편리함들이 존재성을 잃는 일. 더 나아가선 나를 지켜내는 행위마저 처참해지는 일까지. 전쟁은 그러한 과정을 겪는 일일 테다. 나의 부모세대가 당한 6.25 전쟁도, 현재 진행형인 멀고도 가까운 나라의 전쟁도 물리적 거리는 동떨어져 있다. 다만 깊은 상상의 길 위에서 생채기의 갈래길이 사방팔방 난다. 물 만난 캡슐커피가 몇 초만에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올린다.         


6월 11일에 태어난 키 세븐 병아리가 어미품에서 무럭무럭 자란다. 지난가을과 마찬가지로 알크메네가 이번에도 23일간 알을 품었다.    



   이사 후 3년간은, 강우 때마다 천장 가장자리로 흘러내리는 빗물 때문에 애를 먹었다. 방은 기본이고 거실, 부엌, 세탁실, 옷방까지 두루두루 돌아가며 양동이와 수건을 받쳐놓고 잠을 설쳤다. 집 지을 때의 책임자를 불러봐도 방수 실리콘으로 땜질하는 도리 말곤 없는 듯했다. 지난여름엔 5백만 원을 들여 옥상에 방수페인트 작업을 했다. 그래도 증축한 창고에 이어진 옷방 천정은 비의 날마다 눅눅하다. 옷장에 든 모직 계열의 의류와 가방은 죄다 곰팡이 꽃을 피웠다. 제습기를 사야만 했다. 세상에나 네상에나, 어디에서 그 많은 물이 빠져나오는가. 3.1리터짜리 물통을 하루에 서너 번씩 비웠다. 통을 들어 올릴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옷방의 제습기는 뜨끈한 몸체로 물기를 빨아들인다. 사흘간 열한 통을 비웠다.


   물난리가 잦아드니 누전차단기가 내려가는 일이 잦아졌다. 전기밥솥과 전자레인지를 한 번에 돌리면 탁. 전기레인지와 세탁기도, 건조기와 전기주전자도 탁탁탁. 차단기 수명이 10년이라는데 대체 어찌 된 건가. 전기수리기사를 부르니 정격전류가 더 높은 것으로 교체하란다. 어이없게도 차단기는 중고란다. 주택 부실공사도 모자라서 그런 자잘한 것마저도 사기를 쳤다니, 헛웃음만 나왔다.

   

도동마을에서 2.5km 거리인 후리마을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한 동서네 4인 식구. 리모델링한 흰 보금자리가 따듯하고 정겹다. 주말에 삼겹살 파티로 집들이를 했다.



   장마철의 전기누전은 우리 집만이 아닌 듯, 예의 그 전기기사는 이튿날에 왔다. 집안과 마당 구석구석을 살핀 지 두어 시간. 지난해의 도시가스 설치공사 중 한 인부가 실수한 걸까. 땅속에 묻은 전깃줄을 찍어놓고 흙을 덮어버렸으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전선 하나가 땅속에서 일을 벌인 것이다. 전선을 교체하고 나자 여기저기서 띠리라 뚜르로 또르루…, 제각각의 인사말을 전하는 반가운 얼굴들.    


   저녁나절에 다시 텃밭의 쌈채소, 고추, 오이, 깻잎, 대파 등을 따서 손질했다. 도동마을과 2.5km 이웃인 후리마을의 동서네 집들이에 가져가는 용도다. 이사든 지 한 달 남짓인데 자그마한 텃밭엔 이런저런 야채들이 자라고, 리모델링한 하얀 집은 4인 식구의 오손도손함으로 정겹다. 삼겹살을 구워 소맥 한 잔씩을 나누는 친척들의 담소 시간. 모기와 날파리도 덩달아 현관문을 들락거리며 시골살이를 환영한다. 남편도 시동생도 남자의 전원생활 로망을 이룬 셈이다. 가까이에 어머님이 계시고, 야채는 텃밭에서 자급자족. 6월 11일에 태어난 청계 병아리도 곧 데려갈 예정이라 달걀도 우리 집처럼 자급자족.   


어젯밤부터 뇌성벽력과 폭우가 이어졌다. 봄 가뭄이 심하더니 우기가 사납다. 옆집 노처녀 살찐이도 뒷집 총각 강생이도 꼼짝없이 갇혀 눈이 팅팅.



   아침에 닭을 보러 간 첫째가 옴마아, 옴마아~ 허겁지겁 내달려왔다. 닭장에 회색 닭이 빳빳하게 옆으로 누워있다는 거다. 양파를 손질하던 과도를 내던지고 함께 내려가 보니, 어찌 이런 일이. 어제 오후에도 멀쩡히 나무 그늘에서 흙 목욕을 하고, 온 텃밭을 헤집으며 벌레를 쪼아 먹은 암탉 이오가 그렇게. 혹시 더위를 먹고 기절했나 싶어서 첫째가 찬물을 떠 와서 뿌려보았다. 이미 세상을 등진 모양이었다. 닭털이 날린 흔적은 없다. 독뱀에게 물린 것일까. 기도에 뭐가 걸려서 숨이 막힌 것일까.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뿐 달리 어찌하겠는가. 당산나무 가까이에 있는 감나무 곁에 남편이 묻었다. 수목장으로 쓸쓸히 치러진 닭의 장례. 혼자 외롭지 말라고 장미 두 송이와 안녕을 적어 꽂아주었다.

  "천상의 텃밭에서 닭장 밖을 새처럼 날아라, 이오…!"    


  장닭 제우스와 벌레를 쪼아 먹던 연회색 암탉 이오. 천상의 텃밭으로 떠났다. 작은 몸은 당산나무와 가까운 감나무 아래에 스몄다. 혼자 외롭지 말라고 꽃과 안녕의 말을 두 송이씩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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