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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신꽃신내꽃신 Oct 03. 2022

도동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상, 이장이 말씀드렸습니다

   


   

   "도동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오전 9시 30분부터 경의고 실내체육관에서 효도 경로잔치가 열리니 많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이장이 말씀드렸습니다."

   선선한 바람을 이끌고 창틈을 비집는 아침 8시 19분의 이장님 말씀. 10월 2일, 제26회 노인의 날 경로잔치 안내방송이다. 모닝커피를 마시며 마당을 걷고 있으니 여가수의 트로트 가락이 짱짱 울려 퍼진다. 태화루 잔술에 거나해진 어깨춤이 마당 너머의 솔숲을 흔든다. 상북면의 어르신 1천 명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연다는 초대장을 이틀 전에 문자로 받았다. 손주를 얻고 그 손주가 성인이 될 즈음엔 나도 잔술에 취해 어깨춤을 추고 있으려나.



가을이다. 석류는 벌고 대추와 감이 익어 떨어진다.  배추와 무잎이 보들거린다. 텃밭까지 진출한 과꽃 곁에서 청계가 벌레잡이에 한창이다. 새끼들괭이 보금자리가 잠시나마 편안하길..



   시골살이에서만 만날 수 있는 오디오 클립, 이장님의 마을회관 발 안내방송이 짧고도 흥겹다. 푸른 새마을기와 태극기와 울주군기를 나부끼며 마을 소식을 사방팔방 퍼뜨리는 나팔수가 무려 다섯. 여가수 목소리만큼 짱짱하다. 무슨 방송을 하든 도동 주민으로서 귀를 쫑긋거리게 된다. 지난 목요일은 마을 대청소의 날 방송을 했다. 아침 9시에 빗자루 하나를 흔들며 마을회관 앞으로 갔다. 불참하면, 농사짓는 이들의 정부 보조금인 직불금을 5퍼센트 깎는다는 소문이 난 참이었다. 어떻게 그런 규정까지 만들어 마을 대청소를 시키는지는 모를 일이다. 홍시와 감잎이 제철인 요즘의 골목길은 쓸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떻게든 빗자루를 들어야 하는 때. 반소매티와 반바지 차림으로 짧은 빗자루를 덜렁대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교장선생님(20여 년 전 고교 교장으로 은퇴해 늘 교장선생님으로 불리는 뒷집 어르신)이 허허허 웃으셨다. 이모님 뻘의 한 분은 "아이고, 토시라도 끼고 나오지. 다 타겠구마는." 나는 좀 머쓱해졌다. "그러게 말입니더. 날이 제법 덥네예. 하하하."



우리 마을 도동회관의 깃발은 다섯 나팔수를 데리고, 낡은 세월만큼 어여삐 나부낀다.



   우리 집이 도동마을 5반 소속인 걸 처음 알았다. 이장님은 코로나에 걸렸다 한다. 가끔씩 서류 같은 걸 들고 초인종을 누르는 분이 단체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런 후의 길지 않은 대화. 5반의 결론은 각자의 골목과 집 앞 쓸기로 모아졌다. 도로가에서 배수구 청소를 하는 반, 누군가가 몰래 버린 쓰레기 뭉치를 청소하는 반은 마대자루를 끌며 땀을 흘렸다. 한 골목을 오가는 교장선생님과 골목을 쓸었다. 나의 서툰 빗자루질이 성에 안 찼는지 "골목은 내가 쓸 테니 댁의 집 앞을 쓸고 들어가요. 아이그, 하루빨리 이 주인 없는 감나무를 베어버려야 하는데. 이게 제일 말썽꾼이라니까!" 대빗자루로 쓱싹쓱싹, 터진 홍시들과 감잎을 풀밭 쪽으로 쓸어내신다. 우뚝한 감나무 아래가 곧 말끔해진다. 우리 집 앞은 부지런한 남편이 아침 일찍 청소를 한 터. 나는 빗자루질 흉내만 내다가 대문 안으로 슬며시 스몄다.      

     


   해가 뉘엿거릴 때 텃밭에 청계들을 풀어놓았다. 요즘 닭들의 눈치가 예사롭지 않다. 배추와 무잎이 보들보들 자라고 있어서다. 내 눈길이 방치되는 순간, 벼락같이 내달려 어린 잎을 세상 맛나게 쪼아 먹는다. 감시의 눈초리에 닭들이 울타리 쪽으로 몰려가고, 마을회관 나팔수들이 우렁찬 입을 연다. "도동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 마을 대청소에 많은 주민이 열성적으로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1반 20명, 2반 10명, 3반 7명, 4반 8명, 5반 7명, 총 52명의 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신 덕분에 우리 마을이 더 깨끗하고 활기찬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이장으로서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앞으로 더 화목하고 정이 넘치는 우리 마을이 되도록 서로 돕고 협조하여 나가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딩~동~댕~동." 시그널 음악과 함께 한 차례 더 확인 방송을 하는 이장님. "도동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 마을 대청소 날에…"



내일은 꽃밭의 꽃사과를 모두 따서 꽃사과주를 담가야지. 당신을 불러낸 겨울비의 밤에 달콤한 술잔을 부딪쳐야지.


   어둠이 한순간에 밀려든다. 텃밭을 헤집고 다니던 닭들이 저 알아서 횃대에 올라앉는다.  병아리들은 천지분간을 못하고 애를 먹인다. 문쪽으로 몰아갈 때마다 난리법석으로 더 뛴다. 잎이 무성한 깻잎 줄기와 줄기가 많은 아로니아 나무 틈에 숨어서는 나 잡아봐라, 놀리기가 예사다. 병아리를 데리고 놀던 검은 닭 알크메네는 얼마 전부터 새끼를 독립시키고 원래의 무리 틈에 섞였다. 겨우 겨우 병아리 4마리를 몰아넣고는, 알을 품는 또 다른 검은 닭 에우로페를 살펴보았다. 수탉의 괴롭힘으로 윗등의 털이 심하게 빠진 암탉. 지금 저 품속에 알이 들기나 한 걸까. 남편이 매일 알을 강제로 꺼내기 때문이다. 쉼 없이 병아리를 키울 순 없단다. 털이 다시 자라날 기회라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 무슨 부당한 처사인가. 본능적인 모성 행위를 강제로 앗아버리는 이런 모진 일이라니. 그러다 보니 에미닭이 이 둥지 저 둥지로 옮겨 다닌다. 다른 암탉이 알을 낳아둔 곳에서 매번 새로 품는 거다. 그런 알들을 남편은 매일 꺼내오고. 알을 품는 일도 천형 같은 것일까. 꼼짝없는 자세에 어떤 날은 눈동자를 살피고 칸막이를 두드려보기도 한다. 아무리 오랜 날이 지나도 줄탁동시가 완성될 수 없는 알과 에미. 검은 닭 에우로페는 병아리가 나오지 않는 자신의 품을 털고 일어나게 될까. 아무것도 안 먹고 알만 품다가 저대로 망부석, 아니 망아석이 돼버리는 건 아닐까.



지금은 누가 뭐라해도 과꽃과 백일홍의 분홍시절


   그 많던 봉선화가 저물면서 꽃밭은 과꽃과 백일홍 세상이 됐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는 분홍 세상이 초록을 배경으로 낙엽 이전을 맘껏 누리고 있다. 그 뒤에서 국화가 바통을 넘겨받는 중이다. 여름과 겨울을 잇는 징검다리가 짧고도 길다. 내일은 꽃밭의 꽃사과를 모두 따서 꽃사과주를 담가야겠다. 4년 된 나무에 서른 개쯤 열렸다. 마트에 나와 있는 25도, 30도, 35도 담금주 가운데 25도가 덜 부담스럽다. 과실의 수분이 빠져나오면 도수가 줄어들어 목 넘김도 부드러워진다. 에탄올 도수는 18도 이상이 돼야 과실주에 미생물이 번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19도, 20도, 21도 소주는 희석 기간을 고려하면 불안하다. 자연 설탕 맛으로 노랗게 익어갈 꽃사과주 향이 벌써부터 군침을 돌게 한다. 어느 겨울비의 날, 따듯한 실내의 창가에서 꽃사과 같은 사람과 부딪치는 잔은 몹시도 맑고 어여쁘리.   



   아침엔 옆 마을의 오디오 클립 방송이 가랑비를 매달고 언뜻 들려왔다. 반복된 말로 짐작컨대 오늘이 대청소의 날인 모양. 커다란 모자와 비옷 차림으로 마을길을 청소하는 사람들 모습이 어른거렸다. 옆 마을도 지금쯤 더 깨끗하고 활기찬 삶의 터전이 되었겠다. 문득 창으로 내달려오다 동쪽 산으로 방향을 트는 노랑턱멧새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광고가 없어서 듣기 편한 오디오 클립, 도동회관 발 안내방송은 내일 또 들리려나. 비가 그치면 5백 원을 들고 회관에 들러볼까.



둘째가 바람 쐬러 가서 잡은 4마리 배스로 포식하는 청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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