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타티스 Oct 25. 2020

나의 선택

자유, 선택에 대한 책임이 필요하다.

세 번째에서 일곱 번째 만남


 시간이 흘렀다. 머릿속은 기록해야지 하면서 한 달이 지나갔다. 그 사이 상담 선생님과 다섯 번 만남이 이어졌다. 어떤 날은 2회기 연속으로 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못하기도 했다. 그 사이 혼란스러웠다. 대화를 나누는 영역이 가족의 가족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글로 바로 옮겨버리면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담아보려 했는데, 기억하려니 희미해져 버렸다. 역시 기록은 기억보다 정확하다. 


부모님이 하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참 핑계가 많은 사람이었다. 공부도 부모님이 하라고 해서 하고, 첫 번째 대학 전공도 부모님이 하라고 한 걸 선택했다. 결혼도 준비과정에서 멈추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한 마디에 그대로 진행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때는 거역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몸 안에서 내 의견을 바깥으로 꺼낸다는 것이 힘들고 무겁게 느껴졌다. 부모님께서 자식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는 있다.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노력했을까. 

 십 대 내 딸에게는 말한다. "엄마 말이 틀릴 수도 있어. 그래도 엄마고 걱정되니 너에게 강하게 말할 수도 있어. 그때는 꼭 네 마음의 소리를 따라갔으면 좋겠어. 엄마가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거든. 네 인생은 네 거니까."

 내가 엄마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내 딸은 자기주장을 조금씩 한다. (아마 다 하는 건 아닌 거 같다.) 가끔은 "엄마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거북했다. 지금은 고맙다. 우리가 좀 더 친밀한 관계이기에 아이가 엄마에게 불편할 수도 있는 말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바꾸어 생각해보면 나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엄마는 군대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자라면서 엄마와 감정을 나눈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난 이후로 2년 뒤에 동생, 또 2년 뒤에 동생, 또 4년 뒤에 동생을 낳으셨다. 첫 해에 부모님께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는 엄마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고 전해주셨다.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했다. 내가 큰 아이를 출산하고도 줄곧 그랬었다. 나는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었다. 그래서 착한 아이로 자라야 했다. 모범생이라는 이름 속에 진짜 나를 꽁꽁 숨기고 살았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엄마가 나를 향해 웃었던 기억은 장학금을 받았을 때였다. 아니 딱히 웃었던 기억도 아니고 기뻐하셨던 기억이 난다 정도이다. 내 기억 속에 엄마의 웃는 모습은 없다. 나는 엄마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까. 내가 열심히 하면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착각했나 보다. 지금 보니까 그렇다. 엄마는 원래 웃는 사람이 아니다.


십 대, 이십 대의 나는 부모님이 하라는 걸 잘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 착각했었다.


웃는 엄마


(오늘 적는 글들은 실제 상담내용은 아니다. 상담을 한 후 몇 주가 지난 후 내가 떠오르는 생각들을 쓰고 있다.)

동생이 올해 딸을 낳았다. 나에게는 소중한 둘째 조카다. 코로나 19가 심각할 무렵에 조카를 만나지 못했다. 출산 후 100일 정도 지났을 때 처음 만났다. 그 이후로 시간 나면 종종 만난다. 유치원 교사 출신 동생이 육아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가 생겼다. 동생은 수시로 웃는다. 분명 몸이 힘든 시기일 텐데 딸을 향해서 웃고 또 웃는다. 조카도 덩달아 웃는다. 동생이 보낸 조카 영상을 웃는 영상이 많다. 난 두 딸을 키우고 있다. 엄마로서 그 시기를 두 번이나 보냈다.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큰 아이 때는 뭐가 좋은 줄 몰랐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줄 모르고 보냈다. 처음 만나는 육아의 힘듦, 시댁에서 시부모님, 시누이와 함께 살면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저 힘들게 느껴졌다. 둘째는 돌 때까지 친정에서 키웠다. 그때도 참 힘들었다. 내 기억에는 본인 집에서 육아를 하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다. 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유목민 생활을 했더랬다. 그저 나는 환경적 영향으로 그렇게 반응했던 것이 당연하다고 본인을 합리화시키며 살았다. 어쩌면 엄마도 비슷한 심정으로 나를 키웠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웃어준 적이 없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지금의 큰 딸에게 웃어주려고 노력한다. 환경이야 어찌 되었든, 내가 하는 행동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걸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딸들 기억 속에 매일 웃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 웃음은 진심이었던 엄마로 기억되고 싶다. 


다음에 남길 내용들


이렇게 남겨놓지 않으면, 묻어 두고 쓰지 않을 거 같다.

- 선생님의 상담 연기

- 빌려주신 책들

- 두 번째 사춘기

지금 떠오르는 건 이렇다.



사실 이 글도 쓰지 못할 뻔했다. 내가 꾸준히 쓰는 스타일이었다면, 아마도 뭔가 이루지 않았을까.

100일 글쓰기를 처음 함께했던 인생 동지분이 나에게 제안해주셨다.

다시금 글을 쓰는 게 어떠냐고.


혼자 살 수 있을 거라 착각한 시간들이 있었다.

지금은 안다. 함께 하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각자 하면서 함께 하는 이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상담도, 글쓰기도 그렇다.


글을 쓰는 건 자유다.

살면서 매 순간 어떠한 생각을 하고 행동할지 선택하는 것도 자유다.

하지만 그 이후에 감정, 행동의 결과를 책임지는 건 나다.


마음이 무겁다고 쓰지 않으면 그 순간 생각들을 흘려보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지금이 그렇다. 몇 번이나 느꼈으면서 또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다음 내 상담 주제가 되지 않을까.


알아차린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마흔살자아탐색기

매거진의 이전글 모호함을 견디는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