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여유로웠다면 아쉬움
사진출처 :Pixabay로부터 입수된 Ted Erski님의 이미지입니다.
주말 단골약국에 방문했다. 약사언니가 대학원 동기와 절친이다. 소식을 전해 들었다. 대학원 동기언니는 이번에 졸업을 한다. 두 학기 밀렸다. 약사 언니가 전하기로, 논문이 마무리된 후 메일로 전해진 교수님 피드백이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두 가지 마음이 올라왔다.
1) 맞아. 우리 교수님은 그런 분이지. 잘하고 열심히 한 부분은 인정하고 자상하게 칭찬해 주시는 분이지.
2) 나도 여유롭게 논문을 적었었더라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언니 상황이 부럽지는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느껴진다. 한 학기 밀리는 바람에 자격증 합격도 취소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부러웠다. 교수님의 '인정'이다.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래서였는지 모르겠다. 부족한데 억지로 억지로 졸업하려고 하다 보니 무리하는 게 많았다. 교수님의 인정을 그토록 받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부족함을 한껏 드러내고 대신 교수님의 '보호'를 받았다. 뭐라도 받아서 다행이었나.
주말 동안 석사 졸업 논문을 다시 읽었다. 학회 포스터발표 때문에 요약을 해야 했다.
다시 읽으니 보인다. 왜 다른 교수님이 그렇게 화를 냈는지 말이다. 지금처럼 여유가 있었다면 내 졸업 논문은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 문단 한 문단 공들여서 쓸 수 있었을까.
학부생 때 학회지 제출 논문을 쓴 적 있다. 도서관에서 다른 논문들을 참조하며 고군분투했다. 논문을 권했던 교수님께 논문지도를 받은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내가 찾아가지 않은 거였다. 그 도서관 풍경과 공기가 아직도 떠오른다. 처음에 막막함, 그다음 하나씩 해나갈 때 성취감, 원고료를 받았을 때 뿌듯함을 경험했었다.
석사 논문은 뭔가 쫓기듯이 해야 하는 조급함, 후회만 남았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바빴을까. 전쟁터에서 버티는 느낌이었다. 돈도 벌어야 했고, 아이들도 돌봐야 했으며, 집안일도 하면서, 수업도 듣고, 성적도 잘 받으려고 공부도 해야 했다. 모든 걸 다 그렇게 '잘'하려고 했을까.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보니 쉬엄쉬엄 할 수 없었다. 두려움보다 더 큰 생존의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도 그랬다. 자주 반복해서 꾸는 꿈이 있었다. 꿈꾸면 전쟁상황이고, 부모님은 부재했다. 나는 세 동생들을 지켜야 했고, 땅굴을 파고 들어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린 장면이었다. 스무 살까지 그 꿈을 셀 수 없이 반복해서 꿨다.
금요일 슈퍼바이저 선생님의 슈퍼비전을 들으면서 그 장면이 떠올랐다. 내담자가 얼마나 힘들지 느껴졌다. 내가 그러지 않았는가. 석사 시절 내 모습이기도 했다. 그때 내 모습이 애달파보이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있는 곳이 전쟁터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서 박사 진학 시에는 여유를 두고 논문을 쓰려고 한다.
또 아쉬움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동안 나에게 바쁨 = 생존이었다.
이제는 '쉼'을 선택하려 한다.
물론 지금 하는 걸 놓진 않을 거다.
수련도 계속하고, 공부도 계속하고, 상담도 계속할 거다.
하지만 마음에 여유를 품고 살아가려 한다.
쉬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해주려고 한다.
*당분간은 깊숙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글을 계속 쓰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