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빨랫감들
올해 처음 건조기를 샀다. 신세계였다. 장마철도 꿉꿉한 빨래냄새가 겁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건조기는 큰 단점이 있었다. 빨래가 줄어드는 게 아닌가. 이제 적응 중이다.
요리에는 재능이 없지만 빨래는 진심이다. 건조기에 적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일단 줄어드는 재질을 가진 빨래들은 건조 30분만 돌려서 물기만 날린 상태로 다시 베란다에 넌다.
얇은 재질로 보풀이 일어나는 옷감은 아예 건조기에 넣지 않는다. 양말도 줄어드는 경우가 많아서 30~40분 시간건조만 한다.
이 분류 이전에 속옷, 수건은 삶음 모드로 하기에 따로 모으고, 밝은 옷, 어두운 계열 옷도 따로 모은다.
그러므로 삶은 모드 빨래(이건 기본건조), 밝은 옷(기본건조, 30분 건조, 건조기 돌리지 않음), 어두운 옷(기본 건조, 30분 건조, 건조기 돌리지 않음), 양말 이렇게 나뉘게 된다. 빨래는 수시로 하지만, 날 잡고 하는 날에는 하루 종일 돌린다.
이렇게 구분하게 된 이유는 어릴 적 엄마의 세탁기 덕분이다. 들어가면 색이 물들어서 나오고, 섬유유연제를 쓰지 않으셔서 냄새나고, 옷도 줄어들어서 나오기도 했다. 사 남매 빨래하느라 힘드셨을 것이다. 나는 현재 네 식구 빨래도 돌아서면 해야 하는데, 여섯은 얼마나 많았을까. 이해는 되지만 당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내 방식을 찾은 것이다.
이렇게 세탁하는 목표는 옷을 오랫동안 처음 모습 그대로 입는 거다. 그러려면 짙은 색 빨래가 밝은 빨래에 물들이지 않게 따로 분류하는 것이 첫 번째이다.
오늘 내 마음도 분류가 필요했다. 상담센터 출근 전에 큰 딸이 학교를 안 간다고 해서 30분 동안 그 마음을 들어주었다. 출발해야 하는 마지노선 시간까지 이야기를 듣다가 부랴부랴 출발했다. 이후 학교를 갔는지 안 갔는지 알 수 없었고, 도착해서 전화하니 아이 전화는 꺼져있었다. 하루 종인 마음이 쓰였다. 법적으로 처리할 일이 있어서 아침에 그 일처리 하고 회의에 들어갔다. 회사 전산 시스템이 갑자기 바뀌어서 로그인이 되지 않았다. 상담 일정을 확인해야 했기에 그 처리를 하느라 마음이 부산스러웠다. 내담자 한 분은 종결을 앞두고 있어서 챙겨봐야 할 것이 있었고, 접수면접이 있어서 새로운 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었다. 접수면접은 끝난 후 보고서, 심리결과 결과 입력 등 여러 가지를 챙겨봐야 해서 신경이 쓰였다. 마지막 상담은 오후 5시라서 마치고 나서 보고서를 적느라 6시 문을 잠그러 내려온 분을 인사도 듣지 못했다. 그 사이사이 포스터 관련 박사과정 선생님과 통화도 했다.
하루가 어떻게 갔나 싶었다. 집에 오는 길은 1시간이 걸린다. 운전하며 오늘 내 마음이 어땠나 떠올려보았다.
상담사 역할 스타티스 : 개인상담, 접수면접, 다른 일처리 완료
엄마 역할 스타티스 : 딸 마음 들어주기, 저녁 먹고 싶은 것 시켜주기, 잠들기 전 둘째 학교에서 있었던 일 나누기 완료
가정 운영 역할 스타티스 : 설거지, 재활용 버리기, 법 관련 일처리 완료
기타. : 실내자전거 타기 30분, 아침명상 5분, 졸업 동기와 통화하기, 학술대회 같이 가는 선생님들과 일정 나누기 완료
빨랫감을 구분하듯이 내 마음을 구분해 보았다.
복잡했던 마음들이 뭔가 정리되는 느낌이다. 아직 무거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혼란스럽고 바쁠 때보다 나은 느낌이다.
머릿속으로 생각정리만 하다가 글루틴 덕분에 글로 정리하는 중이다. ‘이렇게 살고 있구나’ 알아차린 시간이기도 하다.
마음속 세탁기에 넣기 전에 빨랫감을 구분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할까.
시간이 지나야 빨리는 빨랫감이 있고,
오늘 세탁이 끝난 것도 있다.
‘그랬구나, 오늘 이렇게 애썼구나.’ 알아차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