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7 목
교수님께 교육분석을 받고 집에 돌아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뭔가 모를 마음의 찝찝함이 남아있다.
"그게 선생님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건가요?."
집에 오는 내내 '네????? 무슨 말씀이시지?'
'지금 내 마음이 어떤가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씀이신가?'
오늘 교육분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그동안 내 마음이 1순위가 아닌 삶을 살았다.'
그래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을 내가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또 오늘은 눈물에 콧물까지 났다. 깊은 슬픔과 마주했다. 올해 상반기에 이 마음과 만났다고 생각했었는데, 다 몰랐었다.
나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전제가 달랐던 거다. 나는 나를 나름 잘 데리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니였다. 지난 세월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거였다. 그 세월에 대한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그 감정이 슬픔으로 올라왔다. 눈물은 상실의 표현이었다.
상담 내용을 여기 다 적을 수는 없지만, 깊은 슬픔의 구멍에서 엉엉 울다 나왔다는 이야기를 남겨놓을 수 있을 거 같다. 오늘은 집에 돌아와서 그 슬픔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교수님이 하신 질문이 계속 맴돌아서 정신이 없었다. 집안을 왔다 갔다 하다가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하다가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다. 그러다 "진짜 내가 그러게 왜 이렇게 힘든데 왜 하는 거지?"
학교 갔다 돌아온 딸이 답했다.
"그러게 궁금했어. 엄마가 괴로워하면서 왜 공부 더 한다고 하는지 궁금했어."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알아차리게 되었다.
나는 재미있어서 하는 거였다. 교수님이 하는 질문이 괴롭지만, 한편으론 나에게는 새로운 영역을 깨우치게 해주는 과정이었다.
사람마다 재미를 정의하는 게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새로운 걸 알게 되는 게 재미있다. 그리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달라지는 게 좋다. 그러면 희망도 생긴다. 10년 뒤 나도 지금과 다르겠지. 이런 생각들도 재미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재미있다.
오늘 집에 와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펼친 책, 라틴어 수업에서 한동일 선생님도 그러신다.
뭔가 배우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있어 보이려고, 젠체하려고 시작하려면 좀 어떻습니까? 수많은 위대한 일의 최초 동기는 작은 데사 시작합니다. 지금 전 세계 수억의 사람들이 보는 '유튜브' 역시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는 영상 클립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거시적인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삶의 긴 여정 중 한 부분인 학문의 지난한 과정은 어쩌면 칭찬받고 싶은, 젠체하고 싶은 그 유치함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소위 배움에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고 합니다. 라틴어뿐 아니라 그 어떤 것을 공부하든 공부가 즐겁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예 즐겁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뭔가 거창한 목적마저 있어야 한다면 시작하기 전부터 숨이 막힐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뭔가에 관심이 생기고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내가 왜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왜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한번 들여다보세요. 그다음 내 안의 유치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비난하거나 부끄러워하기보다 그것이 앞으로 무엇이 될까. 끝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지치고 힘든 과정에서 오히려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어주지 않을까요? 그러니 이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의 그 마음이 그저 그런 유치함이 아니라 '위대한 유치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라틴어수업, 한동일, 흐름출판>
내 안의 유치함이었다. 그저 재미있어서 할 뿐이다. 집단상담에서 이야기한 적 있다. "들으시면 재수 없을 실 수 있는데 저는 공부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지금 보니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한 멘트였다.
그저 재미있어서 할 뿐이다.
괴롭더라도 힘들더라도
재미있는 순간이 있어서 계속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