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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티스 Dec 04. 2023

사랑하려고

내가 글 쓰는 이유


 9시 전에는 나오고 싶었다. 시계는 9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세탁기는 돌아가고 있고, 설거지는 아직. 로봇청소기를 돌리기 위해서는 바닥을 정리해야 한다. 집을 둘러보니 어지럽다. 내 마음 같다. 중학교 3학년인 딸에게는 방을 정리하라고 하면서, 정작 우리 집은 너저분하다. 정리한다고 해도 물건들이 말끔하게 쏙 제자리로 들어가지 못한다. 왜 그럴까. 우리 집은 항상 이럴까.


 여성학자 박혜란 선생님은 아이들이 크는 동안 정리에 큰 에너지를 들이지 말라고 했던 거 같은데.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책에서 봤던가. 이토록 기억도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내 마음에는 어떤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어찌 그리 정리를 잘하는 걸까.


 단톡방에 사진이 올라왔다. 노란 스웨터다. 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울세탁모드로 돌려서 햇볕에 말리는 중이라고 했다. 그 색감이 예뻐서 옷을 좋아한다고. 난 그 스웨터보다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 일부. 그 사진을 떠올리며 우리 집을 둘러봤다. 1월에 이사 오면서 옷들을 정리해서 버렸다. 그 이후에 또 옷이 늘었다. 예전 집에서는 한 방을 옷방으로 썼었는데, 이번에 이사 오면서 두 아이 방을 각각 만들어주면서 옷방이 빠졌다. 신식 아파트가 아니라서 옷방이 따로 설계된 집이 아니다. 핑계를 이렇게 대지만 옷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남편은 그랬다. “넌 어딜 이사가나 정리가 안될 거야.” 처음에는 부인했는데 이제는 수긍한다. 내 뇌 속 구조가 그렇다. 어데어 뭘 넣어야 하나 혼란스럽다. 당장 편한 곳에 건다. 한동안 그 이유를 몰랐다.


 사진을 보며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물건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다. 그 지인은 마음이 쏙 드는 옷 몇 벌을 깨끗하게 관리한다. 2년 동안 안 입은 옷은 과감하게 버리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한다고 했는데, 뭐가 부족한지 몰랐었다. 예전에는 버리는 것도 못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선택하지 못했다. 버리려고 하면 ‘이건 다음에도 필요할 거 같은데.’ 혹은 ‘이건 추억이 담긴 물건인데.’ 이러며 미련을 남겼다. 남편은 이런 나를 답답해했다. 과거 이사 가기 전 물건을 하나씩 꺼내며 물었다. “이건 필요하니?” “지난 2년 동안 입었던 거니?” 하나씩 물어봐주었다. 그렇게 정리를 처음 배웠다. 이번 이사에는 나름 정리하고 과감하게 버렸다. 첫 몇 달은 정리한 물건들이 유지도 되었다. 1년이 다되어가니 다시 너저분해졌다. 예전 집보다 수납공간이 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물건들이 넘쳐난다. 이것이 다 필요할까.


 최근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뿐 아니라, 내가 하는 일, 내가 소유한 물건까지 확장되고 있다. 어떤 물건을 들이기 전에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 쉽게 사는 편이다. 욕심도 많다. 좋아 보이는 걸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크다. 그러니 물건이 늘어난다. 어차피 자주 쓰는 건 많지 않다. 텀블러만 해도 그렇다. 최근에는 제주도 여행 갔을 때 스타벅스에서 사 온 노란 보온물병만 쓴다. 집에는 부엌 수납장 한 칸 가득 텀블러가 들어있다. 나는 그 텀블러 모두를 사랑하는 걸까. 대답은 '아니다'였다. 좋아 보여서 그냥 집에 데리고 왔던 거다.


 어쩌면 내 삶도 이런 패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좋아 보여서’ 선택하고, ‘좋아 보여서’ 시작했다. 막상 하면서 조금만 힘들어도 그만두곤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또 한마디 했다. “뭘 한 가지 정해서 10년은 해보는 게 어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시작부터 치자면 6년 차이다. 그 사이 이 일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도 머뭇거리게 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글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대답할 수 없다. 좋아하긴 하는 거 같다. 놓을 수 없다. 계속 붙잡고 있다. 미련인가? 절절히 사랑한 적도 없다. 나는 연탄보다 못한 삶은 살고 있었던 거였다. 온몸을 불태워 본 적 없다. 항상 몸 사리며 적당히 유지했다. 남편이 답답해하는 게 이런 부분이었다. 물이 끓으려면 임계점을 넘어야 한다. 임계점을 넘으려면 자신의 한계와 마주해야 하는데 그 용기가 없었던 거다.


‘부족한 나’를 만나야지 임계점을 넘을 수 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좋아 보이는' 물건들을 모았던 거처럼 나도 '좋아 보이는' 사람이고 싶었다. 이제는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나'를 끌어안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글을 쓰려고 한다.


 나를 진짜로

‘사랑하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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