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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티스 Jan 03. 2024

대화, 연결

남편과 새해 첫 대화

2023.1.2 화


"그래서 넌 2024년에 뭘 할 건데?"

질문이 입력되면, 말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다.


예전에는 남편의 말투에 집중했었다. '나를 공격하나?' 이 생각에 힘든 시절이 길었다. 이제는 안다. 이건 관심이다. 2024년을 보낼 '나'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번역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긴 세월 다툼과 오해, 미움을 안고 살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올해 18년 차 부부이다. 난 스물여섯에 결혼했으니, 8년이 지나면 부모님과 함께 보낸 세월보다 더 오래 산 유일한 사람이 된다. 하긴 부모님과도 아직도 마음이 통할 수 있는 대화 방식을 찾는 중이니(40년 넘게) 지금 이 과정을 거치는 건 당연한 일이도 모른다.


요즘 남편과 대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이거다.

'그가 나에게 주려고 하는 건 뭘까. 나는 뭘 받고 있는 걸까.'

'그가 진짜 나에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 뭘까. 뾰족한 말투 뒤에 담긴 진심을 알아차리자.'


 우리의 대화를 텍스트로 옮긴다면 그야말로 오리지널 대문자 T(MBTI에서 F(감정형) T(사고형))이다. 둘 다 ENTJ로 내가 더 사고형에 가까운 부부였다. 내가 하는 말이 맞고 틀린가, 상대가 하고자 하는 말이 사실인가 아닌가에 집중했다. 남편과 대화에서 처음 배운 건 Fact 체크였다. "너, 그거 진짜야? 찾아봐." 우리는 대화 중에 스마트폰으로 자료를 찾곤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요즘은 어딜 가나 자료를 찾아본다. 두루뭉술하게 아는 것보다는 한번 찾으면 제대로 알게 되니까 편한 부분은 있다. 하지만 '부부사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의문은 있었다. 정확하게는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상처를 받았더랬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어디서 상처받는지도 모르고 기분이 나빠져서 싸움으로 이어졌었다. 그 패턴의 반복이었다. 각자 T(사고형)인데 상대에게 F(감정형) 반응을 기대했다.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가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만 많았다. 상담을 공부하고, 상담을 받고, 내가 하게 되면서 내 모습을 만나고 있다.



1월 1일 오후 카페에서 남편과 2024년 첫 대화를 나누었다.

"넌 2024년 뭐 할 거야? 계획을 이야기해 봐."

(이랬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녹음해두지 않았으니 문장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예전에는 '이 사람이 또 뭘로 공격하려고 하나?' 싶었다. 이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생각한다. '내 계획이 궁금한 걸까. 혹시 그가 뭘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닐까?' 그래서 내가 물었다.


"자기는 올해 뭘 할 건데?"

그랬더니 술술 이야기한다. 올해는 작년보다는 더 활동적으로 움직이고 싶다고 했다. 나도 계획은 있다. 하지만 그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할 건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의 반응이 무서워서 내가 뭘 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방향성은 빼고 뭘 하는지는 이야기한다. 

'무슨 요일에는 상담실 출근해.'

'오늘은 교수님께 논문지도받으러가.'

내가 하는 행동, 생활에 대해서는 공유한다.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가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공유한 지는 한참 된 거 같다.

그 시작점에는 "네가 뭐하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라고 했던 남편의 말도 한 몫했다. 그때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지금은 그 말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에릭 번의 교류분석에서는 이러한 대화를 '이면교류'라고 한다.

표면적인 말의 의미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다른 경우를 말한다.


남편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또 말한다.

"너 계획 없는 거지? 내가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거 보니까 명확하지 않구먼."

그 말도 맞는 거 같다. 

하지만 나는 연말이 되면 내년 계획을 세운다. 올해는 2024년 건강, 읽기 쓰기, 상담, 공부, 자격증, 즐거움, 가족 이렇게 크게는 일곱 개 파트로 각각 세부 실천계획 100가지를 세워두었다. 그리고 큰 방향성도 있다. 그런데 왜 남편에게는 선뜻 이야기하지 못한 걸까.


이 간극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무엇이 이 머뭇거림을 만들고 있는 걸까.

마음이 가까운 상담동료 선생님이 물었다면?

친한 언니가 물었다면?


머릿속이 컴퓨터처럼 돌아갔을 거 같다. 무엇부터 이야기해 주지? 어떻게 하면 잘 전달될까 고민하며 신나서 이야기했을 거 같다. 그들은 나에 대해서 관심 있게 궁금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해석할 필요가 없다. 이면교류가 아니다. 질문이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상보교류 대화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대화에서는 한 번 해석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어디까지 이야기하면 내가 안전한지 고민한다. 이 조율의 시간이 있다.


하루가 지나서 오늘 아침이 되었다. 상담실 출근 전 남편과 차 한잔을 두고 식탁에 앉았다.


"자기야, 나는 올해 자격증 취득에 집중해야 할거 같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그 자격증이 필요하네. 그러려면 시간을 투자해야 할 거 같아. 그리고 이번 방학에는 둘째가 학교 공사로 학교방과후 수업이 없어서 둘째 데리고 오전에는 도서관 가거나 나들이 갔다가 오후에는 눈높이랑 줄넘기 학원 보낼 거 같아.

 교수님 논문지도는 둘째 방학 끝나면 간다고 하려고. 아무래도 둘째랑 온전히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방학 같아서. 그리고 집이 좀 어지러운데 일주일에 한 파트씩 정리할게. 부엌, 거실, 큰방, 작은방, 베란다 이렇게. 몇 주 걸릴 거 같아. 또 나 올해는 살을 좀 빼고 싶어. 딱 5킬로만 빼면 좋겠는데. 일단 해보고. 그러려면 필라테스는 지금처럼 주 2회 가거나 혹은 3회까지 늘일 수도 있을 거 같아."


이렇게 대답하기까지 하루가 걸렸다. 

나는 빠른 척하지만 뭔가 느린 사람이다. 상황에 적응하고 내가 반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자기가 이야기해 준 유튜브, 상담실. 나도 진짜 하고 싶어. 그 방향으로 갈 거야. 그런데 나는 시간이 좀 걸리는 사람 같아. 차근차근하고 싶어. 그 방향으로는 갈 거야. 그런 면에서 자기한테 고맙게 생각해. 방향을 설정하는데 자기 도움을 많이 받아. 자기 없으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나 오늘 새로운 상담케이스 2개를 시작해. 어제 책상에 앉아 있었던 건 미리 MMPI-2 결과지 보고 어떻게 상담을 할 건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서였어. 우리 상담 쪽에서는 진단을 하지는 않아. 그건 병원에서 하지.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해. 심리검사 결과지를 통해서 본인이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어려움을 파악하기도 해. 그래서 심리검사를 하는 거 기도 하고."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런 남편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내 말을 온전히 들어주고 있었다. 이 글을 적는데 그 장면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울컥 나려 한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던 대화의 장면인가.


올해 나의 큰 목표는 이거다.

남편과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동안 눈앞에 일들을 가족보다 더 우선순위를 두고 살았었다.

돌아보면 남편과 두 아이가 없다면 지금 나도 없다.

뭐가 중요한지 매 순간 알아차리며 사는 2024년을 만들어가고 싶다.


환경은 통제할 수 없지만,

내 마음의 방향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알아차리기 위해서 글을 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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