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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티스 Jan 11. 2024

부부의 10년 예산안 회의

남편의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

2024.1.11 목


"앉아 봐 봐."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낮에 남편이 2024년 올해 예산안 엑셀파일을 보내주었다. 일요일 저녁 9시부터 12시까지 현재 지출현황을 정리했다. 지금을 기준으로 향후 계획을 했다.


우리는 회사에서 만났다. 매년 12월은 1년 동안 지출한 예산을 마무리하는 달이고, 매년 1월은 새로운 예산을 받는 달이다. 난 예산담당은 아니었다. 기술직 직원이었지만 여직원이라는 이유로 우리 파트의 예산만 임의로 정리했었다. 워낙 숫자에 약해서 과장님이 매번 남은 예산을 물어도 엑셀시트를 열어서 확인하곤 했다. 일시사역 월급계산, 4대 보험 지출 등 숫자만 등장하면 실수할까 봐 벌벌 떨었다. 결혼 후 남편은 그때 과장님처럼 가계 지출 현황 보고를 원했다.


지난 17년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퇴근 없는 직장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것도 가장 못하는 파트를 반복하는 지옥 같았다. 남편 또한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모를 수가 있지?' 그에게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둘의 사이는 서로의 고통만큼 멀어져 갔다. 


뭔가 못하면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숫자와 관련한 걸 숨기려 했다. 남편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해야 하는 계획형 사람이었기에 그런 나는 시한폭탄 같다고 했다. 지금도 여전하다고 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리스크는 나라고 한다. 예전에 그가 그런 말을 하면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화를 냈고, 크게 싸우거나 못하는 걸 회피하려 했다. 


상담을 공부하고 난 후로, 내 모습이 보인다. 여러 가지 심리검사, 교육분석도 도움이 되었다. 그가 말하는 그 말속에 담긴 내가 진짜 내 모습은 아니겠지만, 일정 부분은 나보다 더 정확하게 본 부분도 있다.


'조하리의 창'이라는 내용에서도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네 가지 영역으로 바라볼 수 있다. 

나도 알고 타인도 아는 열린 창, 나는 알지만 타인은 모르는 숨겨진 창, 타인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장님의 창,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르는 미지의 창이다.


남편은 타인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장님의 창에 대해 알려주었다.

내가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서 그 내용을 수용을 할 수 있고, 없고 달라졌다. 지금은 그의 말속에 담긴 속뜻을 찾는 중이다.


예전에는 '왜 이렇게 내가 약한 부분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걸까? 잘하면 본인이 하면 되지!' 싶었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남편의 말투다. 그때보다 10분의 1 정도는 부드러워졌다. 아마도 그건 듣고 있는 나의 태도가 달라져서일 것이다. 대화는 상호작용이니 말이다.


아무튼 우리 부부는 오늘 10년 치 가계 예산안을 작성했다.

내가 이제 명확하게 이해되었다. 예전에는 부담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발끝부터 내가 무슨 이유로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알 거 같다. 우리 부부는 둘 다 ENTJ로 사고형이다. 왜 그런지 이해가 되면 행동으로 이어지는 시간은 빠른 편이긴 하다. 남편이 10년 치 계획을 엑셀을 통해서 보여준 건, 내가 지금 이 순간 어떤 마인드로 살아야 하는 건지 숫자를 통해서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남편은 내가 공부는 하고 있지만, 상담 수련을 하고 있지만, 박사를 진학하려고 하고 있지만 혹시나 사회적으로 역할을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불안하다고 한다. 내가 못 미덥다고 했다. 예전에는 기분이 나빴다. 그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오늘은 달랐다. 그의 걱정이 사랑으로 느껴졌다. 남편은 내가 진심으로 걱정되었던 것이다. 


"네가 너로서 살기를 바라."

라는 남편의 말속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있었다. 


17년 만에 처음으로 그에게 숫자를 통해서 앞으로 인생을 알려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 또한 진심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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