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해요" 네 글자의 힘
2024.1.18 목
밤 9시 9분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남편이었다.
"남방, 양복, 그리고 파란색 넥타이, 부탁해요. 천천히 오세요."
저녁에 급하게 약속이 생겨서, 집에 못 들른다고 낮에 연락이 왔었다. 남편 회사와 시댁이 가까워서 술을 많이 먹거나 다음 날 일찍 나갈 일정이 있으면, 남편은 본가에 머무른다. 시댁 식구들은 남편 방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사람과 술을 좋아하는 편이고 일도 많기에 현재 주 2~3일 정도는 본가에서 지낸다.
내일 아침 6시 20분경에 KTX를 탄다고 했다. 본가에서는 20분이면 가는데, 우리 집에서는 40분 이상 걸린다. 낮에 통화할 때는 괜찮다고 했었는데, 밤 9시에 카톡이 온 것이다. 카카오톡에서 "부탁해요"라는 네 단어를 보는 순간, 몸이 바로 움직였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우리 부부는 평소에도 말투가 강한 편이다. 그 영향도 있을 것이다. 대화보다는 문자가 좋다. 억양이 쏙 빠진 텍스트만 보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특히 위 네 단어는 육성으로 남편에게는 들어 본 기억이 거의 없는 말이었다.
남편이 지정해 준 양복, 넥타이를 들고 시댁으로 향했다. 밤 9시 45분경 벨을 눌렀다. 시누이가 문을 열어 주었다.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옷만 주고 가려고 했는데, 형님이 차 한잔을 권했다. 시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셨다. 둘째 딸과 함께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분홍과 보라색 중간 어디 즈음인 비트차도 한잔 마시고 왔다. 따뜻하고 고소한 맛이었다. 남편은 귀가 전이라서 통화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과거의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때는 뭐 그리 억울한 것도 많고, 불편한 것도 많았을까. 결혼하자마자 시댁에서 살았다. 먼저 결혼한 시누이도 함께였다. 4월에 만나 12월에 결혼해서 남편이 그리 편하진 않았다. 만나면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은 분명 있었는데,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퇴직 전에 사 남매 중 한 명은 결혼하길 강력하게 원하셨다. 그나마 이십 대 후반인 내가 유력했고, 제대로 연애는 처음이라 부모님께 인사드리려 했다가 결혼으로 이어졌다. 우리 결혼은 친정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결혼이었다. 내가 원한게 아니었다고 생각해서였는지, 그렇게 불편했다. 친정부모님은 스물여섯에 시댁살이를 하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등을 떠밀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부모님을 원망했다. 오늘 갔던 시댁은 과거 내가 감옥처럼 느꼈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갔다 올 수 있었을까.
십칠 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십 년 넘게 난 시댁에 가지 못했다. 그러한 시간들이 지나서 '지금'이 있다. 그때와 지금 다른 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제는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이다.
'부탁해요.'라는 네 글자가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움직이게 만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술을 꽤 먹은 목소리였다. 조수석의 아이와 다정하게 통화하고, 내일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과거의 몇 장면의 기억들이 지나갔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미래가 희망적인가 보다.
오늘은 그랬다.
다정한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에 대한 기록.
*붙임 : 밤 12시가 넘어서 남편에게 고맙다고 전화가 왔다. 이 또한 기록하고 싶은 따뜻함.
"고마워."라는 말은 음성이 담겨도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