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에 대하여
2024.6.14 금
책을 읽다가 '지평선'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외국저자의 책이라 한국어로 번역할 때 이 단어를 선택했겠지만, 어떤 의미로 썼을까 고민하며 읽었다. 그러다 문득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 떠올랐다. 음악만 듣다가 뮤직비디오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상담실 출근일이다. 상담실 데스크 담당 선생님이 아파서 조퇴한 덕분에 내가 오늘 데스크를 지키고 있다. 이 자리의 장점은 상담실에 흐르는 음악을 마음대로 선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들은 크라이슬러(kreisler)의 음악을 듣다가, 윤하의 음악으로 바꾸었다.
생각이 많은 건 말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나에겐 우리가 지금 일 순위야
안전한 유리병을 핑계로
바람을 가둬 둔 것 같지만
기억나? 그날의 우리가
잡았던 그 손엔 말이야
설렘보다 커다란 믿음이 담겨서
난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울음이 날 것도 같았어
소중한 건 언제나 두려움이니까
문을 열면 들리던 목소리
너로 인해 변해있던 따뜻한 공기
여전히 자신 없지만 안녕히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하나둘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솔직히 두렵기도 하지만
노력은 우리에게 정답이 아니라서
마지막 선물은 산뜻한 안녕
현재 읽는 책에서 '관계'와 '소통'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정확하게는 연결감을 느끼지 못했을 때의 고통, 모멸감에 대해서 다룬다. 내가 이 책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한 사람과 한 사람 간의 대화에서 진정한 연결이 있을 수 있을까, 혹시 그 소망이 좌절되었을 때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찾고자 했던 구절을 발견했다. 이 씨앗으로 아마 다른 걸 시도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이 음악의 가사를 들고 온 이유는 현재 읽는 책의 내용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구절들을 인용한 후에 접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우리는 보통 발신인의 메시지가 수신인에게 전달되는 것이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발신인, 메시지, 수신인 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의사소통의 메타포는 여전히 우리 문화에 널리 퍼져 있다. (80쪽)
-예컨대 편지를 받아 읽는 사람은 편지를 보낸 사람이 뜻한 바와 전혀 다르게 내용을 이해할 수도 있다. 이는 전송 중에 편지의 내용이 달라져서가 아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이 글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편지의 수신인은 글을 읽을 때 수동적이지 않다. 편지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그는 텍스트 하나하여 펼쳐서 해석해야 한다. (중략)
읽는 사람은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임하면서 읽은 것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해석하려 한다. 독자는 행과 행 사이에 자신이 해석한 의미를 부여한다.(81쪽)
-사람들은 객관적인 진실을 서술하기보다 주관적인 생각에 따라 자기 경험을 설명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뿐만 아니라 인간은 당사자 자신과 각 상황마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타인이 어떤 그림으로 그려지는지를 눈에 보이듯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133쪽)
내가 이 두 맥락을 접하고 정리한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각자의 내적 세상이 있다. 우리의 내적세상은 상대에게 가 닿을 수 없다. 내 마음,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나의 것이 그대로 전달되기는 힘든 일이다. 이 책에서는 편지를 예로 들고 있다. 읽는 사람은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는 거다. 나의 바람은 내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 바람은 거의 매번 좌절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해받으면 기분이 좋다. 전하고 싶은 무언가가 잘 전달된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담에서 '공감, 이해, 수용'과 같은 단어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상담실에서 느껴져야 하는 것들을 담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은 '생각이 많은 건 말이야'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노래를 수없이 많이 들었음에도 오늘에서야 이 문장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와 네가 다르다는 걸 인정했다고 느껴진다. 내가 너와 같은 생각이라고 느낄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사 속 주인공은 안다. 우리는 각자 세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말들이 가 닿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 아닐까.
관계가 소중한 만큼 연결됨을 느꼈을 때, 기뻤지만 두렵기도 했다. 그 두려움을 마주했다가 이제는 수용하는 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 둘의 연결감은 끊어졌다. 헤어진 것이다. 각자의 세계가 이제 연결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과거가 반짝이지 않은 건 아니다. 서로가 이어진 순간의 기쁨도 있었다. 그 또한 인정한 것이다. 이제는 각자의 마음속에서 그 추억들이 다른 방식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났지만 다르게 기억될 것이다.
지금 읽는 '모멸감'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구절도 나온다.
'나의 지평선과 타인의 지평선이 "융화'되어 교집합이 형성되는 곳에서 진정한 소통이 일어날 수 있다."(179쪽)
가사 속 인물은 진정한 소통을 경험한 것일까.
그들은 진정 만났던 순간이 있었을까.
아니면 상상 속에서 일어났던 순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