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하리의 창
2025.5.6 화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나에 대해서 네 가지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것을.
첫 번째, ‘열린 창’ 영역이다. 나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아는, 보이는 영역을 말한다. 이름, 나이, 외모, 직업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보이지 않은 창’과 ‘숨겨진 창’ 영역이다. 대인관계에서 생겨나는 상호작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창’은 나는 모르고 상대는 아는 영역으로, 성격이나 행동 등이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고 하는 어떤 행동이지만 타인에게는 관찰 가능한 부분이다.
‘숨겨진 창’은 다른 사람은 모르고 나는 아는 영역이다. 감정, 욕망,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 등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미지의 창’은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는 영역이다. 잠재된 능력이나 무의식적인 감정 등을 포함한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착각하고 산 세월들이 있었다.
나는 고작 두 영역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열린 창’과 ‘숨겨진 창’. 가끔 가까운 사람들이 어떤 부분을 ‘지적’하면 깜짝 놀라곤 했다. 예를 들면 친정 가족들도 그랬다. 동생들은 가끔 나의 ‘보이지 않는 창’ 영역에서 말투 등을 지적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굳이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십 대, 이십 대에는 그랬다. 하지만 내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많은 부딪힘들이 생겨났다. 특히 시댁에서 함께 사는 시절에는 ‘보이지 않는 창’과 ‘미지의 창’을 매일 마주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은 곧 당황스러운 감정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생의 중년기이기도 하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또 다른 나의 모습도 꽤 많이 만났다고 생각한다. 상담을 전공하며 여러 심리검사를 통해서 나름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를 마주하려고도 노력했다. 교육분석을 통해,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를 안전하게 만나기도 했다. 이제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긴 하지만, 주로 ‘열린 창’의 영역에서 만나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가까이서 들여다볼 기회는 적은 편이다. 친밀한 사람들은 이제 나에 대해서 ‘이 친구는 그렇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경우가 많기에 피드백을 받을 기회는 적다.
예전에는 참 당황했었다. 어떠한 의도의 피드백이든 말이다. 이제는 누가 나에게 툭 말을 건네주면 생각한다.
1. 내가 소화시킬 수 있는 피드백인가?
2.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시간을 두고 생각한다.
이번에 맞춤법 피드백이 그랬다.
나는 글을 쓰고 나면 퇴고가 참 어렵다. 그냥 글을 올려버리고 싶다. 퇴고에 약하다 보니 글이 더 나아지는 기회가 적었다. 십 년을 넘게 글을 써왔지만 자기만족에 그친 이유도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글쓰기는 퇴고를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알면서도 하기 힘든 건, 운동이 몸에 좋은지 알지만 매일 하기 어려운 것과도 비슷하다.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글을 길이가 짧아서 더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어제는 글 올리기 전에 몇 번이나 다시 보고, 전체를 지우고 다시 쓰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미래의 내가 읽기에 더 좋은 글이 되겠지. 이 일을 계기로 퇴고에 더 신경 쓰기로 마음먹었다.
또 한 가지 영역을 더 알아차리게 되어 기록해두려 한다. '보이지 않는 창'과 관련된 영역이다.
몇 년 전 전세자금을 돌려받지 못해 10개월간 스트레스받은 적이 있다. 나는 마음이 어려워지면 몸으로 증상이 나타나는 '신체화'경향성이 있는데, 당시에는 월경이 몇 달 멈추었다. 내심 반가운 마음에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했더니, 아직 폐경 시기가 아니라고 생리 유도 주사를 처방했다. 이후로 몸은 다시 정상화되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열두 살 이후에 매우 규칙적으로 배란과 월경이 이루어졌다. 임신과 출산 기간을 제외하고 말이다. 첫째 아이는 매달 생리통이 심해서 바닥이 데굴데굴 구를 정도인데, 난 얼마나 아플지 추측만 할 뿐, 극심한 신체적 통증은 없다. 복부 팽만감 등 약간의 불편감만 있을 뿐이다. 다만 PMS(생리 전 증후군) 기간에는 감정기복이 심하고 예민해진다. 그저 그 정도로겠거니 생각했다.
'요즘 화를 머금고 있는 거 같아.'
우연히 알게 된 내 상태였다. 며칠째 그런 상태였는데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화가 폭발 직전에 이렀던 다음날, 생리가 시작되었다. 평소보다 주기가 빨라진 상태였다. 지난달에는 과제와 강의로 스트레스를 받아 예상일보다 일주일 정도 일찍 시작되었다. 그저 호르몬의 영향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챗GPT에게 PMS증상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리고 화가 나는 건 어떤 상태인지 더 자세히 물었다.
PMS(Premenstrual Syndrome)는 생리 전 증후군으로 가임기 여성의 50-80%가 겪는 흔한 증상이다. PMDD(Premenstrual Dysphoric Disorder)는 생리 전 불쾌감 증후군은 월경이 시작되기 약 1-2주 전부터 일상기능이나 대인관계 뚜렷한 영향을 받는 장애였다. 책에서 생리적 불쾌감 증후군 관련 글을 언뜻 본 적 있지만, 나와는 무관하다고 여겼다.
핵심 증상은 다음과 같다.
뚜렷한 감정기복, 울음, 심한 예민, 분노, 대인갈등, 절망감, 불안, 긴장, 초조, 집중곤란, 피로, 무기력, 식욕변화, 폭식, 특정음식 갈망, 수면 과다 혹은 불면, 감당하기 어려운 압박감, 통제상실감 등이 있으며 체중증가와 복부팽만 등 신체적 변화도 나타난다.
PMS는 불편하지만 대체로 일상 유지가능하고, PMDD는 정서 증상이 심해 학업, 직장, 관계에 지장이 큰 차이점이 있었다. 과거의 나는 PMDD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PMS와 PMDD의 중간 즈음으로 추측된다.
삼십 년을 넘게 매달 겪는 증상인데, 몰랐다. 나는 참 세세하게 관찰하는 영역에 약하다. 나에 대해서 이토록 모를 수가 있었다니.
학창 시절 겪었던 심각한 우울도 학업스트레스뿐 아니라 호르몬의 영향도 있었던 것이다. 결혼해서도 매달 일정기간에는 매우 예민해져서 부부싸움을 하곤 했는데, 그것 역시 호르몬의 영향이었다. 나의 성격적 문제가 아니라 말이다.
최근 일주일 넘게 자다가 새벽 3,4시에 자꾸 깼다. 워낙 어릴 적부터 자주 있던 일이기도 하고, 강의 준비로 부담이 컸던 탓이라 여겼다. 그런데 생리가 시작되자, 거짓말처럼 푹 잤다.
이번 달은 24일 주기로 생리를 시작했다. PMDD는 생리 시작 1~2주 전부터 영향을 준다니, 한 달의 절반 동안 수면에 영향을 받는 셈이다. 그 기간 동안 야식에 대한 욕구도 높아진다.
이 모든 것이 단순히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리 주기와 호르몬의 영향이었다. 자제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어쩌면 유전적·환경적으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원인에는 스트레스, 수면 부족, 카페인, 운동 부족 등이 있다고 한다. 이런 요인들이 증상을 더 악화시켰을지도 모른다.
그 시기 동안 나는 화를 머금고 살아왔던 것이다. 생리 시작 1~2주 전, 그 기간 동안 말이다.
30년 넘게 이렇게 살아왔는데, 나는 나에 대해 몰랐다.
돌이켜보면, 친정 식구들도, 남편도, 아이들도 나에게 피드백을 해줬었다.
"너 생리할 때 됐지?"
그들은 나를 관찰해 알려줬겠지만, 그때는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반감이 생기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잘 들렸을까?
어쩌면 나도 나를 들여다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그들도 예전보다 더 잘 들리게 표현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 누군가 나에 대해 이야기해 주면 조하리의 창을 떠올려본다.
‘내가 몰랐던 나’ 일 수도 있으니까.
그들에게 ‘나’를 소개받는 기분으로 그 이야기를 듣는다.
요즘, 내가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