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순간을 유리병에 담듯, 글감을 수집하며 산다는 것
2025.6.26 목
몇 년째 참여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이 있다.
그곳에서는 자주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몇 번이나 써봤던 질문이다.
그땐 무선 키보드를 꺼내고 노트북을 열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글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 않았다.
“나는 왜 글을 쓰지?”
질문을 곱씹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거 한 장면에 머물렀다.
당시는 오래된 주택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주방에서 환풍기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짜증이 확났다. 집도 작은데, 환풍기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음식냄새가 공간 전체이 퍼져나간다.
그 무렵 나는 산후우울증이 깊어지던 시기였다.
잠을 잘 수 없었고, 아기를 돌보느라 몸도 마음도 탈진해 있었다.
처음에는 사는 것도 그다지 즐거운 일도 없는데, 안되는 일만 많아서 그 마음에 보탠 느낌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 속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새들이 환풍기 통로 끝에 둥지를 틀고 낳은 알들이 부화해서 아기새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 뒤로 요리도 조심스러워졌다.
환풍기를 켜지 않은 채,
어린 새들이 자라 둥지를 떠날 때까지
한 공간을 나누며 사는 기분을 누렸다.
그 이야기를 경남은행 백일장에 풀어냈고,
운 좋게도 상을 받아 상금도 탔다.
시댁과 친정에 반반 나누어 용돈으로 드렸다.
그때 처음 알았다.
일상이 글감이 될 수 있다는 것.
지금의 나는,
감정이 일렁이면 가장 먼저 묻는다.
‘글감인가?’
그리고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감정을 글로 옮길 수 있을지,
지금 이 느낌을 어떤 언어로 담을 수 있을지를.
그 덕분에 감정과 ‘나’ 사이에
딱 한 뼘쯤 거리감이 생겼다.
너무 휩쓸리지 않고, 너무 밀어내지도 않으며
관찰자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아주아주 슬픈 일도 글감이다.
기쁜 일은 더더욱 글감이다.
길가에 핀 풀 한 포기의 싱그러움도,
오늘처럼 처음 지도교수님을 만나러 가는 설렘도,
모두 글감이 된다.
나는 아마,
글감을 만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내 삶과 ‘나’를 이어주는
조용하고 단단한 징검다리로서의 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징검다리를 놓듯
조심스럽게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간다.
글감을 만나기 위해.
나를 더 잘 관찰하기 위해.
그리고, 나를 잃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