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선물
냉장고 문을 여니, 애호박 하나가 보인다. 반을 잘라서 배추된장국에 넣었다. 반은 동그랗게 쓱쓱 썰어서 쟁반에 하나씩 옮겼다. 소금 간을 해주고 몇 분 기다리니 호박에서 물이 나온다. 키친타월로 닦아서 밀가루를 뿌려두었다.
"애들아, 밥 먹을래?" 물으니 답이 돌아온다.
"아니, 아직 배 안 고파."
그대로 두고 노트북에 앉았다. 9시에 글루틴 모임이 있고, 10시에는 유데미 강의 특강 일정이 있다. 미리 10시에는 나와야 한다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이 생각을 하면서 다른 일정을 정리한다.
토지완독 모임도 오늘부터 시작이고, 독서치유 모임도 오늘 과제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뭐가 있더라. 다행히 내일 집단상담은 취소되었다. 대학원 후배가 2차 심사 통과했다고 연락이 왔다. 금요일에 만나기로 일정을 잡았다. 그리고 노트북 앞에서 뭐부터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가 묻는다.
"엄마, 밥 안 먹어?"
"엄마 아까 밥 안 먹는다고 해서 지금 뭐 하려고 하는데? 애호박 전 네가 구워볼래?"
그리고는 한 달 동안 같이 글 쓸 글루틴 멤버분들 SNS계정을 살피며 이웃추가를 시작했다. 그리고 독서치유 모임 과제물도 프린트하고, 토지책도 책장에서 빼왔다. 이제 책을 읽을까 하는데 부엌에서 적당히 데워진 기름과 계란이 만나 지글지글하는 전 굽는 소리와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부엌에 가니 아이가 접시에 애호박 전을 가지런히 옮겨두었다. 아까 끓여둔 배추된장국을 뜨는 중이었다. 김치는 내가 꺼냈다. 저녁시간이 이렇게 즐거운 시간이었나. 남편은 아침에 해 뜨는 걸 보고 출근했다. 저녁에는 약속이 있다고 미리 일러둔 터라 우리만 밥을 먹으면 된다. 그래서 더 콧노래가 나왔나? 훗.
셋이 둘러앉아 방금 구운 애호박 전에 겨울 배추 숭덩숭덩 잘라 끓인 국, 물김치, 김장김치, 짭조름한 김, 방금 한 뜨끈한 흰쌀밥을 먹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도 가족 모임으로 뷔페에서 밥을 먹었다. 그날은 가족 행사준비가 내 담당이라 그 많은 음식들의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가족들에게 뭔가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밀린 숙제를 급하게 하는 느낌이었다.
하루 전 날엔 아이들과 같은 뷔페에서 조식을 먹었다. 가족 모임 때보다 음식 가짓수는 적었지만 훨씬 평온하게 음식을 즐기고 왔다. 그런데 그 많은 음식들이 있는 우아한 공간보다 우리 집에서 먹는 그냥 흰쌀밥에 배춧국, 김치, 김, 애호박 전이 훨씬 맛있는 게 아닌가.
애호박 전을 아이가 구워줘서 그랬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이제는 식기세척기를 정말 사야겠다'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아이가 그런다.
"엄마, 남들은 돈질하는데 엄마는 시간질 하더라."
"응? 시간질이 뭔데?"
"돈질은 돈으로 뭐 하는 건데 엄마는 시간을 들여서 뭐 하는 걸 지르더라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으로 또 훗.
'그래서 그랬구나!'
남들 다 사는 식기세척기도, 건조기도 아직 없다.
최근에 들은 말 중 가장 흔들흔들했던 말이 "언니, 아직 건조기 없이 산다고요?"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일하면서 석사논문 쓰고 정신없을 때도 빨래 널고, 설거지하고, 밥 하며 살았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걸, 내 시간을 투자해서 애쓰며 살았다.
그리고 미래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뷔페 예약하고 기다리는 건 두근거리지 않았다.
이렇게 글쓰기 모임을 예약해놓고 기다린다거나, 함께 책 읽는 모임을 신청하고 기다리는 건 기대가 된다.
그래서 아이가 그랬구나.
'엄마는 돈질보다 시간질이라고.'
사실 프라다 가방보다 앞으로 매일 글 쓸 한 달이 더 두근거린다.
그리고 올 한 해가 지나가고, 연말에 내가 어떤 글들을 읽으며 미소 짓고 있을지도 기대된다.
말하면 이루어진다던데, 예전엔 소심해서 마음속으로만 이야기했더랬다.
이제는 글로 써두려고 한다.
올해 12월에는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내 손에 들려있기를.
나를 위한 선물로 이 글을 써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