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비전에 대한 기록
"무엇이 그렇게 무섭나요?"
선생님의 질문은 멍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교육분석이 아니었다. 지난 상담에 대한 슈퍼비전이었다. 그 상담 이후에 상담을 할 자신이 없었다. 상담을 하고 오는 길에는 운전을 하면서 졸았다. 한 번은 터널을 지나는데 눈을 감았다 뜨니까 터널을 빠져나와서 달리고 있었다. 무서웠다. 계속하다가는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했다. 뒤에는 학교 예산으로 추가 4회기 상담이 잡혀서 더 진행했다.
그 이후에 상담을 할 자신이 없었다. '이 길이 나에게 과연 맞는 길인가?' 싶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공부했던, 혹은 일했던 다양한 분야에서 이 시기를 거치는 듯했다. 이번에는 결론을 '상담은 내 길이 아니구나!'로 내렸다. 그래서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상담이 아니라 아르바이트로 인터뷰작업을 했다. 나에겐 더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미있었다. 그 영역들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슈퍼바이저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분만 말씀하신 게 아니었다. 그전 슈퍼바이저 선생님도, 상담영역에 발을 들이게 해 준 그 집단상담 선생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속으로는 그랬다. '나는 사람보다 사물을 더 좋아해요. 그런 내가 상담을 할 수 있다고요?' 물론 혼잣말이었다.
'내가 아픈 만큼 나누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영역'
이라는 문구를 책에서 본 적 있다. 상담사가 쓴 문구였다. 그분은 큰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상담을 했지만 현재는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분의 책 첫 페이지에 그런 문구가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도 그랬다. 요즘도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으면 그렇게 생각한다. '얼마나 더 많이 내가 쓰이려고 이렇게 아픈 걸까'라고.
그래도 놓았었다. 한동안.
작년 하반기에 치열하게 고민해서 다시 상담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디서부터 꼬인 실을 풀어야 할까 생각해 보니 마지막 개인상담이었다. 그래서 오늘 오전 슈퍼비전을 받았다.
슈퍼비전을 신청하면서 '상담자가 도움받고 싶은 부분'에 '어떻게 하면 다시 상담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적었다. 연륜이 짙은 교수님은 예리하셨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지지셨다. 그리고 "뭐가 그리 무서운데요?"라고 물으셨다. 내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니까 계속 질문을 하셨다. 원래 날카로운 분은 아니셔서 그 질문이 당황스럽거나 아프진 않았다. 다만 질문을 받고 나니 '그래, 내가 뭐가 그래 무서웠는데?'라고 묻고 있었다.
실제 일어나지 않을 상황을 상상하고, 진짜 일어났던 그 장면은 회피하고 있었다. 마주하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다 보니 두려움은 더 커졌고 괴물로 되어가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다시 그 장면으로 돌아가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셨다. 우리 뇌는 실제 장면이 아니라도 우리가 그리 했다고 기억한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여기서 또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나름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나에 대한 오해가 깊었다. 내 안에서 나오는 말들은 할 수 있으나, 누군가 질문을 했을 때 반응하는 건 힘들었다. 교수님이 하시는 질문을 계속 곱씹고 있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그 트라우마 상황을 상담장면에서 느꼈나 보네."
생각도 못했었다. 힘들다고만 생각했지, 그것과 그것이 연결되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역전이었다.
과거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주면서도 그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믿지 못할 뿐 아니라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게 되었다.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 거였다. 그것이 트라우마 아닌가.
과거 그날로 돌아가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해 보라고 권하셨다.
어렵다.
왜 이리 어려운 것인지.
교수님께서는 선생님은 혼자 작업할 수 있을 거 같으니, 일단 오늘 나누었던 내용은 기억하라고 하셨다.
슈퍼비전은 그렇게 끝났다.
그 후 오후 집단상담에서 그렇게 졸았다. 과거 상담을 끝내고 집에 갈 때 운전하며 졸았던 그때처럼.
트라우마 상황을 마주하지도 않았고 근처에 가기만 했는데도 이렇게 신체 에너지가 급격하게 빠져나갔다. 오늘도 정말 일어나서 앉아있기가 힘든데,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문득 '이 또한 내가 겪어야만 하는 일들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글을 쓰기 전에는 책을 한 페이지라도 읽자 싶어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책을 펼쳤다. 남편이 보던 책이었다. 빨간 줄로 밑줄이 몇 개 그어져 있었다.
83쪽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85쪽
"결정된 운이 7이면 내 몫의 3이 있다네. 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아버지 집에서 지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굳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 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86쪽
"그러나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세계에 운을 끌어들이면 안 돼."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
"지혜의 시작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이어령선생님 책 속 소제목이었다.
어쩌면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것일 수도 있겠다.
12월부터 1월까지 떠나보낼 관계에 대한 애도작업을 했다. 각자는 최선을 다했을 수도 있다. 각자.
하지만 어쩌면 결정된 운 7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그동안 버틴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3의 자유의지가 모자랐을 수도 있다.
아무튼 결론은 정해졌고, 받아들임의 과정만 남은 것이다.
받아들임이 다음 단계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그것이 지혜임을 오늘 책 속 한 문장으로 만났다.
그리고 과거 상담을 통한 수비와 슈퍼바이저와 대화를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