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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티스 Feb 14. 2023

인생에 대하여

상처와 활이 하나가 되었을 때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94쪽)

알다시피 대장장이가 두드릴수록 강철은 더욱 강해진다네. 보리밭은 밟힐수록 더욱 영글어지지.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고통의 이야기야.


"고통을 피할 수는 없는 건가요?"

"삶의 고통은 피해 가는 게 아니야. 정면에서 맞이해야지. 고통은 남이 절대 대신할 수 없어. 오롯이 자기 것이거든."

(중략)

"인간은 다 다른 삶을 살고 있어. 그러나 추위처럼 모두가 느끼는 감각이 있네. 인류 공통의 아픔이 있으면 내 추위와 남의 추위의 공감이 일어나는 거야. 외로운 섬, 무인도의 삶에서 광장의 삶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 최인훈이 쓴 <광장>도 결국 그런 이야기인거지. 골목이나 골방에 있는 사람은 남의 골방의 아픔을 모르거든. 그러나 추위로 확연하기 느껴지기 전에는 오히려 '모른다'는 인정이 매우 중요하다네."

(중략)

상처와 활이 하나가 됐을 때는, 아무도 끝내지 못했던 그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거야. 인생을 해결할 수 있는 거라네."


(198쪽)

"영혼의 생명력 덕분이네. 필록테테스는 영혼이 죽지 않았어. 오히려 더 강렬해졌지. '나 아파. 나 상처 입었어. 나 외로워'라고 외치는 자기 모습을 객관화해서 바라보았지. 끝없이 아파하는 자기와 그것을 바라보는 자기 그 자기와의 싸움 속에서 맑은 영혼을 갖게 된 거야. 활을 잡게 되는 거지. '바라보는 나' 그게 자의식이고 자아라는 거야."




오늘도 쓰기 위해 책을 펼쳤다. 한동안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계속 읽게 될 거 같다. 떠오른 세 가지 장면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첫 번째, 오늘 오전에 상담실에서 만난 내담자.

2시간 동안 2가지 심리검사와 대화를 통해서 얼마나 힘든지 표현하고 갔다. 이어령선생님의 말씀 중에 고통은 오롯이 자기 거라고 하셨다. 인간은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골방에서 혼자 아파하는 건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추위와 같은 공통의 아픔은 비슷하게 느낀다고 하셨다. 그래서 골방의 아픔은 '모른다'라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상담에서도 그렇다. 내담자의 아픔을 어설프게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한다. 아예 모른다는 태도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지 말고 내담자에게 직접 확인하라고 한다. 그것이 일상적인 대화와 상담의 다른 결이라고 배웠다. 처음에는 누군가 말할 때 내 경험에서 비슷한 것이 떠오르면 아는 척했다. 그들의 아픔과 나의 아픔을 겹쳐서 보았다. 결국엔 나의 아픔을 타인에게 공감을 바라는 모습이기도 했었다.  안전한 공간에서 털어놓고 내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다시 글로 꺼내기도 하면서 상처와 마주하기도 했었다. 내가 살려고 했던 작업들이었다. 


상처와 활이 하나가 되다.

오늘 읽은 구절 중에 계속해서 맴도는 문장이다. 내 마음속에서 내가 보기 싫은 부분이 있었다. 밀어 두고 안 보려고 했고, 타인에게서 그러한 모습이 보이면 다른 사람을 더 싫어하기도 했었다. 사실 그건 내 모습이었다.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였다. 내가 상처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다른 사람에게 그걸 꺼내서 보여주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인정하고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에는 상처가 있다는 걸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다.


상처에는 딱지가 앉는다. 더 두껍고 단단해진다. 한동안은 다른 피부보다 더 딱딱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활까지 된다는 건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처는 각각 다를 것이다. 하지만 치유하는 내용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비슷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내담자의 심리검사 결과를 해석하면서 종이에서, 그래프에서 그분의 아픔이 느껴졌다.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엄마와 관계, 주변사람들과 불편함, 그리고 내가 온전히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책임감. 그분은 도망갈 때가 없었다.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무기력을 호소했는데 그건 내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을 다 컨트롤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압도감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상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을 객관화시키는데 곁에 있어줄 수는 있을 거 같다. 심리검사와 같은 도구를 가지고, 상담과 함께 말이다.


내 상처들이, 내 눈물방울들이 활이 될 수 있을까.


이어령선생님은 상처와 활이 하나가 됐을 때 인생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셨다.



둘째, 과거와 다르게.

 21년도 1월에 융의 '그림자' 개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내 삶의 지난 패턴을 찾아보고, 예전에는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고 있다. 나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방법 중 하나이다.

 MBTI 초급 수업을 들은 건 20년도 1월이었다. 

 예전에 나는 무슨 일이든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효율이 중요했다.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되도록 안 하려고 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즐거움의 욕구를 저 바닥까지 억누르며 그렇게 살았었는지. 사실 알고는 있다. 부모님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거였다. 그분이 원하는 모습 대로 살아가려고 내 모습을 누르며 살았었다. 

과거 나라면 아마도 초급부터 전문강사 과정까지 최대한 빨리 따려고 했었을 거다. 지난주 일요일 전문강사 과정을 마쳤다. 여기까지 오는데 4년이 걸렸다. 중간중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네가 진짜 원하는 거야?'

'다른 ENTJ들이 한다고 너도 하는 거 아니야? 네 선택이 진짜 맞니?'

'굳이 전문강사까지 할 필요 있을까?'


하나씩 답을 하면서 이제 수료하였다. 뿌듯했다. 내가 온전히 이루어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거 이룬 성취들 중에 나에게 오롯이 와닿지 않았던 건,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살고자 애쓰며 살아서이지 않을까.


나를 객관화시키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셋째, 자가치유가 활이 되는 날.


 며칠째 왜 '상처'라는 단어에 계속 머물러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이 문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상처와 활이 하나가 되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이어령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나의 시선대로 해석해 보자면 이랬다. '상처가 활이 되려면 자신의 객관화해서 들여다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라고.


객관화해서 보고 나면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 이후에는 활이 될 수 있을까.

오늘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다시 상담을 시작하게 된 이유이다.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는 분들,

이제 자신의 상처를 알아차리게 되어서 앞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한 분들,

혹은 자가치유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한 분들,

어쩌면 상처가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분도 있겠지.

그 상처를 들여다볼 용기를 가질 수 있게


곁에서 함께 머물러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랬다.


오늘 오랜만에 통화한 동생이 그랬다.

"언니 바쁘다는 시간 동안, 언니 글에서 위로받았어요."라고.


글도 함께 머물러 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나의 상처가 활이 되려면,

더 공부하고,

더 생각하고,

더 열심히 써야 하는 거였다.


^^;;;


잉, 결론은 항상 이 쪽으로.

이건 예전하고 비슷한 패턴인데??



결국 제자리다. 다시 시작하면 되지 뭐.

^^;; 어쨌든 가고 있는 게 어딘가. 어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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