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희망
2주 하고도 훨씬 더 되었나 보다. 집단상담 교수님께서 통도사에 갔다가 매화를 봤다고 하셨다.
'나는 왜 못 봤지?' 싶었다. 나름 강가에 산책도 다니고, 나무들의 계절변화도 눈여겨보는 편인데 말이다.
월요일 딱 2시간만 놀자 싶어서 친한 언니의 작업실에 들렀다 창 밖으로 매화가 보였다. 언니의 화실 바로 옆에 아파트가 있는데, 매화나무가 다섯 그루 있었던 거였다. 내가 앉은자리에서 너무나도 잘 보였다.
'드디어 매화를 보는구나!'
나는 계절 변화를 꽃으로 느낀다. 이른 봄-봄-늦봄-이른 여름-여름-여름한중간-늦여름 등 계절도 꽃에 따라 세분화된다. 나무와 초록이들의 변화는 그렇게 빨리 알아차린다. 아마도 스무 살 조경학과에 입학한 이후 식물은 나에게 계속 머물고 있는 관심영역이다.
오늘 아침에도 강가 산책을 나섰다. 아침에 눈을 뜬 시간은 오전 5시 30분이었다. 아직 사십 대 초반인데도 잠든 지 5시간 30분 정도 지나면 눈이 떠진다. 나보다 딱 서른 살 많으신 우리 아버지, 일흔 초반인분과 수면시간이 비슷하다. 생각해 보니 오늘만 그런 것도 아닌데, 아마도 대학원이 나에게 남긴 흔적인가 보다. 아니면 논문이든가. 아무튼 경험은 몸에 흔적을 남긴다. 식물에 대한 경험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다면, 지나가면 나무와 꽃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감사하게도 학부 4년의 경험은 나에게 식물과 평생 친구를 할 수 있는 흔적을 남겨주었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깨달았다.
'매화를 볼 수 없는 곳에서 매화를 찾고 있었구나!'
언니네 작업실 근처처럼 일부러 매화를 심은 곳이나, 혹은 교수님이 매화를 본 통도사처럼 산 쪽으로 가야 매화를 볼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다니는 길을 벗어나지 않고 일상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매화꽃을 보려고 했다.
사람과 만남도 그랬다.
요즘은 상담사를 하고 있는 분들, 혹은 하고자 하는 분들, 혹은 오랜 지인들을 주로 만난다. 그 지인들도 NVC를 오래 한 분들이라 어쩌면 상담을 이론으로 배운 나보다 실전에서는 더 강한 면도 갖춘 분들이다. 온라인에서는 주로 글 쓰는 분들과 교류를 한다. 그러다 보니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20대의 '나'보다 40대의 '나'를 데리고 사는 것이 더 편해진 건 이러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20대의 나는 성취를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보다 일이 중심이었고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했다. 잘하려고 애쓰다 보니 그러한 사람들이 주변에 몰렸다. 결혼도 그러한 과정 중에 했다. 그랬다. 그때는 사람들에게서 따뜻함을 느낄 수 없었다. 부모님부터 나에게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보다 장학금을 타오는 걸 바라셨다. 사람들과 쓸데없이 시간 보내지 말고 집에 빨리오라고 채근하셨다. 엄마는 용돈을 제한했고, 매일 귀가시간을 체크했다. 불안에 쫓기다 보니, 사람들과 편안하게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누가 봐도 성취지향주의자셨기 때문에 나의 결혼도 아버지의 사회적 성취 중에 하나였다. 퇴직 전에 해야 하는 숙제 중 하나였고 말이다. 쫓기듯 결혼하고 보니, 사람과 사랑은 어디 있었나 싶었다. 추억 없이 한 결혼은 버티기 힘든 순간에 무너지기도 했다. 그 모든 것에 사람은 없었다. 해야 할 '과제'들만 있었다.
40대의 나도 중심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지인들과 만남보다 해야 할 일들을 먼저 한다. 나의 인스타는 친한 언니들에게 나의 근황을 알리려는 목적이 크다. 한동안은 그것도 고민이었다. '도대체 나는 뭐 한다고 이렇게 매일 바쁜 걸까'하고 말이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나에게 질문을 던지면 우야든 둥 답을 찾게 되어있나 보다. 그래서 글을 적기도 한다. 질문하게 위해서. (오늘은 영 글이 산으로 갔다가 바다로 갔다 방향을 자주 잃는다.)
20대와 지금의 나를 굳이 비교해 보자면, 주변 사람들이 달라졌다. 성취지향의 사람들이 많던 집단에서 마음을 알아주고 들어주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옮겨 왔다. 나는 종종 나를 식물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자가치유와 광합성을 하는 건 비슷하다. 하지만 식물은 스스로 자리를 이동할 순 없다.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입장료가 비싼 곳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 장점을 활용해서 이동했다.
그래서 좋아진 건? 나를 데리고 사는데 조금 더 편안해졌다. 원래 내 모양을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도 의지가 된다. 나의 지인들은 지적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봐준다. '그래도 괜찮다.'라고 말해준다. 어떨 때는 나보다 더 화를 내주기도 한다. 가만히 있었냐고 말이다. 나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화를 내지 못하는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20대를 떠올려보면 불안했다. 가까이 있는 이를 믿지 못하는 두려움에 휩싸여있었다. 사람을 믿지 않았었다.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사랑도 하지 못했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이 그렇게 깊었으니, 사람과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십 대 이십 대엔 즐거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있었을 텐데, 장기기억으로 저장을 하지 않았나 보다. 지금은 친한 언니들과 매화를 잠시 바라본 기억도 며칠을 곱씹으며 떠올리고 미소 짓고 있다.
오늘 저녁 9시, 지난주 시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낸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느린 학습자 상담자격 실기과제를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의 나라면 과제가 먼저여서 전화를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제는 안다. 그 무엇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내 에너지가 제한적이라 나의 경계선을 넘어온 가까운 지인들에게 발휘되는 한정적인 에너지라는 것도 알고 있다. 대학원 동기 언니는 오늘 오후 4시에 있었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한 이야기를 신나게 전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깨달았다. 예전엔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구나. 도대체 무얼 위해서 그토록 즐거움을 억압하며 살았었는지.
아직도 나에게 즐거움은 미지의 영역이 더 많다. 하나씩 찾아가는 게 마치 보물찾기 하는 기분이다. 초등학교 때 소풍 가면 내 눈엔 그렇게도 안 보였던 보물쪽지들이 이제야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매화를 만나려면 매화가 있는 곳에 가야 했다.
20대의 내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내가 상담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니까. 상담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삶을 지탱해 주는 이 지인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내 주변에 이미 있었던 보석 같은 인연들도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상담을 하게 해 준 내 상처에 감사해야 할 일이겠지?
어쩌면 상처를 남겨준 그 상황들과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또 승화시키다니.......... 방어기제가 올라오는 걸 보니 뭔가 찜찜한데.)
그렇다고 상처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고는 못하겠다.
이건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건 너무 갔다.
이렇게 적고 보니 마음이 편해진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한 가지 확실한 건
20대의 나보다
40대의 내가 사람을 더 좋아하긴 한다는 거다.
사람에 대한 희망이 생긴 것
이것이 그때와 나의 명확한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