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훑어보며
아침
오늘따라 늦었다. 평소 출발하는 시간보다 10분이 늦은 시간이었다. 대학교 상담센터 출근날이다. 일주일에 한 번 그곳에 간다. 개강한 이후라 밀릴 텐데 남편님이 역류성 식도염으로 힘들어해서 아침에 숭늉이랑 약을 챙겨주다가(평소에는 과일만 챙겨줌) 출발하니 늦었네. 네비게이션이 도착예정시간을 알려주는데 9시 3분이 아닌가. 예전에는 마음속에 불안이 온몸을 압도했을 텐데, 오늘은 '몇 분 늦는다고 큰일 나지 않아.'라는 내 안에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급하게 가다가 사고 나는 거보다 훨씬 낫다. 불안해서 내가 힘들어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네이버 바이브에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듣는 클래식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느긋하게 갔다.
딱 9시 1분에 상담실에 도착했다.
그래 걱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달라지는 건 내 마음뿐이다.
오전과 오후
오전 9시 30분, 사례회의가 시작되었다. 상담원별로 사례를 체크하는데 담당 선생님께서 내가 현재 개인상담 사례가 없다는 걸 알아차리셨다. 그래서 꼭 오늘은 하나를 배정해 주신다고 하셨다. 오전 11시경 사례파일을 하나 주고 가셨다. 내담자와 통화한 후 상담시간을 확정 지으려는데 인턴으로 출근하게 되었다고 개인상담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시 위층 사무실에 올라가서 파일을 돌려드렸다. 그리고 내려오려는데, 바로 체크해 보시고 다른 사례를 주셨다. 다시 다른 학생과 통화하는데 시간이 안 맞는 거 아닌가? 아직 나에게 올 타임이 아닌가 보다 싶어서 다시 파일을 돌려드리고 왔다. (내담자의 개인정보는 소중하기에 꼭 비밀보호원칙에 맞추어 바로바로 처리해야 한다. 개인정보 있는 건 그때그때 파쇄 등)
그리고는 오후에 접수면접에 들어갔다. 나와보니 다시 책상에 다른 사례파일이 있었다. 다시 전화를 했는데, 어머나, 또 다른 요일에만 가능하다고 한다. 몇 번째지? 그래도 챙겨주시려고 하는 마음이 고마웠다. 다시 사무실에 올라가면서 접수면접한 파일을 제출하는데, 그 학생은 맞는 시간이 있었다. 다행히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사례를 배정받았다. 아직 여기서 개인상담을 진행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위로하고 있었는데, 막상 배정받으니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갑자기 맛있는 간식이 먹고 싶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먹고 싶은 간식을 주문받아서 학교 내 편의점을 다녀왔다. 함께 나누어 먹고, 상담 들어간 다른 동료선생님은 책상 위에 간식을 올려두었다. 그 선생님은 상담이 길어져서, 나는 먼저 퇴근했다.
저녁
집에 오는 길은 1시간 넘게 걸린다. 도착하자마자 둘째와 저녁을 먹었다. 이럴 때는 배달까지 해주는 반찬집이 얼마나 고마운지. 화요일은 반찬찬스를 꼭 쓴다.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 심학원 첫 수업이 있는 날이다. '애착외상의 발달과 치료', '애착과 심리치료' 책을 읽고 2명은 발표를 하고 나머지 참여자들은 각자 생각을 토론하는 날이다. 11시 수업이 끝나고 카톡을 확인하니, 동료선생님께 톡이 와있었다.
"잘 들어가셨어요? 수업 마치고 이제 막 버스를 타서 여유가 생기네요. 책상 위에 놓인 간식들 보고 감동받았어요. 너무 고마워요~~ 오늘 하루도 쌤 덕분에 좋은 에너지 많이 받고 많이 웃고 고마웠어요."(오후 10시 2분)
간식사진도 함께 도착해 있었다. 내가 기분이 좋아서, 그리고 나를 응원하는 마음에 간식이 먹고 싶어 졌고 옆에 있는 분들과 나누어 먹었을 뿐이다.
그렇게 이렇게 서로가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했다. 카톡으로 전달하는 마음을 주고받을 때는 핸드폰이 손난로처럼 느껴진다. 따뜻하다. 가슴 저 아래부터.
밤
수업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현관에 쌓여있는 재활용 쓰레기들이 생각났다. 딸을 호출했다.
"우리 같이 재활용 버리러 갈래?"
딸램은 흔쾌히 "그러자."라고 한다. 둘이서 커다란 종이상자 두 개를 끌고 나가는 길에 퇴근하는 남편과 마주쳤다. 나는 남편에게 재활용쓰레기를 버리라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남편이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싸움을 하기도 싫다. 예전에는 억울한 마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딸이랑 달밤에 데이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거의 내가 혼자 처리하지만, 오늘처럼 양이 꽤 많은 날엔 도움을 요청한다. 가끔 남편이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혼자 낑낑거리며 가다가 아파트 입구에서 마주쳤을 때 정도다. (그건 옆집 아저씨라도 그렇게 많은 양을 여자 혼자 들고 간다면 도와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도와줄까?"라고 말은 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아프니까 쉬어."라고 하고 딸이랑 둘이 나왔다.
달은 또 얼마나 밝은지, 이사 오고 나서는 딸의 방에서도 달이 잘 보인다.
"엄마 부럽지? 그러니까 방선택을 잘해야지~"라고 하는데 예쁘다. 이사 온 후 딸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 것이 눈에 보인다.
마감시간이 다되어 가서 오늘 했던 생각들을 나열해 본다.
사실 쓰고 싶은 게 따로 있었는데, 마감에 쫓겨서 매일 쓰고 있다.
안 쓰는 거보다 쓰는 게 낫고,
하루를 그냥 넘기기보다는 이렇게라도 정리해 보는 것이 낫더라.
그래서 오늘도 한다.
글루틴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