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책임감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교육분석하는 날이다. 이번에는 5회기만 받기로 마음먹었으므로, 2회기가 남았다. 교수님께서는 시작 전에 검사지를 하시고, 상담 후에도 검사지를 하신다. 예전 교육분석 교수님과 스타일이 다르신 분이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말을 준비해서 잔뜩 늘어놓고 왔는데, 이번에는 다르다. 무슨 말을 할까 가서 고민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했다가 저 이야기했다가 한다. 최근에 심리검사 2가지를 자체적으로 나에게 실시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했다. SCT(문장완성검사)와 MMPI-2 검사 결과지를 보니, '음, 그리 나쁘게 살고 있는 거 같진 않네.' 싶었다. 특히 문장완성검사에서는 이 사람이 특정분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지 드러나는데, 2020년도 심리검사 수업에서 실시했을 때보다 생각이 바뀐 것이 느껴졌다. 질문지는 같은데 내 대답이 달라졌다. 아무튼 그랬다.
1시간이 지나고 집에 갈 시간이 다되니까, 지금 내가 뭐에 불편하지 나온 게 아닌가.
아이고. 1시간 30분이 또 훌쩍 지나버렸다.
'친밀감'이 이슈일 줄 알았더니, '책임감'이 더 급한 영역이었다.
그것도 '과도한 책임감'이다.
고민이 될 때는 유튜브를 찾아본다. 오은영의 금쪽상담소에서 여경래셰프가 나왔을 때 영상을 다시 봤다. 예전에 봤는데, 이렇게까지 집중하지 못했다. 오늘 보니까 다르게 느껴진다.
-항상 누군가를 챙겨만 줄 뿐.... 본인을 돌보거나 그러지 못하는 거 같아요.
여경래셰프를 가까이서 본 직원이 인터뷰한 내용이다.
여기까지는 '음,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하면서 몰입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런 스타일인 분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기대본 적이 없는 사람
이라는 문장에서 가슴속에 뭔가가 툭 건드려졌다.
나는 의존적인데 독립적이다. 예전 교육분석에서 나온 내용이다. 그때는 '이게 뭐지?' 이해를 다하지 못했었다. 오늘 교육분석에서 교수님이 물으셨다. "고민될 때 누군가와 의논해 본 적 있어요?"라고 하시는데 몇 명이 떠올랐다. "혹시 내 문제만 의논하고 상대의 말은 듣지 않나요?"라고 하시길래, 예전에는 그랬었는데 요즘에는 내 거만 이야기하지 않고 상대의 고민을 묻고 들으려고 노력한다고도 대답했다.
다시 영상의 내용으로 돌아가니 여경래셰프는 본인이 선택할 수 없었던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겪었다. 한 인간으로 나 자신을 봤을 때 느끼는 '근원적 수치심'을 벗어나기 위해 '성공해야만 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또한 '내가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그분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조건은
1) 일적으로 성공하고
2) 인간적으로 대형(큰 사람)이 되는 거였다.
사람마다 스스로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조건이 다르다. 그래서 SCT와 같은 검사를 하는 것이다. 그 검사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상담장면에서 다룰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지난주에 검사한 내 SCT결과지를 찾아보았다.
16. 내가 정말 행복할 수 있으려면 나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연결
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나를 돌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루 일정이 거의 매일 12시까지 해야 끝나도록 만든 건 나를 돌보고 있지 않은 거였다. 또 다른 영상을 봤다.
"당신 자신이 소중한 타인이라면 당신을 그렇게 바쁘게 만들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내 딸이 이렇게 바쁘다면? 나는 당장 줄여라고 할 거 같다. 니 건강이 먼저라고 할 것이다. 우리 딸이라면. 나니까 이렇게 과도하게 일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한 어린 시절에 성적을 잘 받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휩싸여서 내 감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었다. 이러한 부분이 책임감과 결합해서 나는 이래야만 한다는 것에 갇혀 있었다.
1) 나는 유능해야 한다.
2) 나는 타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
3) 내 감정과 욕구는 무시해도 된다.
나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지만 타인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해내기 위해 애써왔었다. 그리고 내가 유능해져서 그걸 모두 해내야 한다는 압박을 나에게 주고 있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밤 11시 30분에 노트북에 앉아서 글을 쓰려면 맥주 한 잔은 필수이다. 나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고 넘어가기보다는 쓰는 것이 훨씬 낫다는 걸 알고 있다. 낮에 써도 될 텐데 꼭 밤 11시 30분에 쓰는 건 미루기 일까 습관일까 아니만 마감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면서 쓰려는 걸까. 어쩌면 셋 다 일수도 있다.
나는 유능해야 하고 타인에게 잘 보여야 하며, 나의 감정과 욕구는 무시해도 되므로 외부 환경에 대한 반응속도가 빠르다. 가령 상담실에 5명이 있어도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받는 건 나이다. 내가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아도 다른 사람이 바쁘면 도와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교육분석 교수님께서 물으신다.
"그러면 00 씨는요?"
그렇게 하고 오면 마음에 불편감이 남는다. 화요일에 어떤 일들이 마음에 남아서 며칠째 내가 왜 내 일을 하지 않고 미루면서 그 사람을 도와줬을까 생각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미루었고, 덕분에 다음날 아침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융심리학 책 읽기 수업에 못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덜 피곤할 때는 내가 어떤지 에너지를 들여서 살핀다.
하지만 피곤이 누적되거나 내가 긴장하며 뭔가 해야 하는 부담 있는 일이 생겼을 때는 이 평온함을 잃는다. 나를 들여다보고 연결할 여유와 에너지를 잃는다. 그러면 환경에 대한 반응속도가 빨라지고 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해야 하는 일부터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드로 전환되면 표정이 굳고, 말이 빨라지며, 말로 상대를 은근히 수동 공격한다. 이런 모습이 나에게서 관찰되었다.
나를 바쁘게 만들면 생기는 일이다.
오늘 교육분석을 마치는데 교수님께서 이 단어를 하나 주셨다.
"숙고해보는 게 어때요?"
이전 교수님께서는 '보유'하라고 하셨는데,
결국에는 나의 어떤 모습이 패턴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나선형으로 둘러둘러 앞으로 가는 느낌이다.
한동안은 이 '숙고'라는 단어를 안고 있게 될 듯하다.